파키스탄의 문제는 미국 정부가 빈 라덴을 악마로 만들어 많은 무슬림, 특히 파키스탄 내의 무슬림에게 영웅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정책은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기지를 둔 테러리즘과 평화수립이라는 광범위한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빈 라덴에만 초점을 맞춘 단일과제로 돌아갔다. 미국 정부는 빈 라덴 정책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프가니스탄 정책은 없었다. 미국은 탈레반을 지지하던 정책에서 그들을 완전히 거부하는 극단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이 탈레반을 거부한 것은 국내에서 벌어진 여권운동 때문이었다. 지바 쇼리슈-샘리 같은 아프간 여성운동가는 페미니스트 머저리티에게 서명운동으로 아프간 여성을 위한 지원을 동원하고, 클린턴이 탈레반에게 더 강경한 자세를 취하도록 해달라고 설득했다. 300개의 여성단체와 노조, 인권단체가 서명을 했다. 이 운동은 코미디언 제이 레노의 부인 마비스 레노가 1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하자 큰 선전효과를 얻었다. 레노 부인은 1998년 3월 한 의회청문회에서 말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상황에 대해서 약간의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수년 간 무자헤딘 그룹에게 무기를 제공해서 소련군과 싸우도록 했습니다."
레노의 도움으로 페미니스트 머저리티는 아프간 여성을 위해 1999년 오스카 수상식이 끝난 다음, 스타들이 참석한 거창한 파티를 열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렇게 썼다.
'여성에 대한 탈레반의 전쟁은 할리우드에서 최신의 유행이 되었다. 티베트가 물러가고 아프가니스탄이 등장했다.'
유명인사가 지배하고 있는 문화에서 유명인사인 레노와 그녀의 의견이 큰 위력을 발휘했다.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던 힐러리 클린턴은 여권운동가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욕심에서 탈레반을 규탄하는 성명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힐러리는 1999년에 한 연설에서 말했다.
"여성이 몸을 완전히 가리지 않았다던가, 걸어가면서 소음을 냈다는 이유로 소위 종교경찰에게 야만적으로 구타를 당할 때,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신체적 구타가 아니라 바로 여성들의 정신을 파괴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정책은 무조건 탈레반을 지지하던 입장에서 무조건 그들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 pp.310-311
탈레반은 후퇴하면서 마자르 남쪽에 있는 마을 카질 아바드에서 적어도 70명의 시아파 하자라족을 학살했고, 아마도 수백 명 이상을 더 죽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 학살의 생존자 소랍 로스탐은 말했다.
"탈레반은 이 마을을 폭풍처럼 휩쓸었습니다. 이들은 70명 가량을 죽였습니다. 그 일부는 목을 칼로 베었고, 일부는 산 채로 껍질을 벗겼습니다."
(중략)
UN의 조사결과 포로들은 죽기 전에 고문을 받았고, 기아상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무덤의 현장을 조사한 UN 특별조사단의 백정현은 말했다.
"그들은 끔찍하게 죽었습니다. 포로들에게는 교환을 하러 간다고 말하고 트럭에 실어서 양들이 흔히 이용하던 물이 10m 내지 15m정도 차 있는 우물로 데리고 갔습니다. 포로들은 산 채로 그 우물에 던져 넣었습니다. 반항을 하면 사살한 다음 던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물에다 사격을 가하고, 수류탄을 던진 다음 불도저로 덮어 버렸습니다."
그 후 목격자의 증언으로 이 비참한 인종청소의 실상이 드러났다. 도스툼에게 체포되었던 말리크군의 장군 살렘 사하르는 말했다.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150명의 탈레반 포로를 끌어내서 눈을 가리고, 손을 등뒤로 묶어서 트럭 컨테이너에 실은 다음 사막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땅에 파 놓은 구덩이 앞에 한 번에 열 명씩 세워 놓고 사격을 가했습니다. 그런 작업이 6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컨테이너를 학살에 사용했다는 사실이 특히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 넣었는데, 양측은 점점 더 이 방법을 학살에이용하게 되었다. 다른 말리크군 장군들 이야기에 의하면, 컨테이너에서 시체를 끌어낼 때 그들의 피부가 열과 산소부족으로 검게 타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컨테이너를 이용한 학살로 1250명의 탈레반이 죽었다고 말했다.
-- pp.112-113
아프간 여성과 아프간 사회의 전반적인 고난은 탈레반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 20년 간 계속된 전쟁으로 아프간의 민간사회와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중요한 완충 역할을 했던 부족공동체와 가족구조가 파괴되었다. 아프간의 인간생활환경지수는 세계에서 가장 낮다. 유아의 사망률은 1000명의 출생에서 사망 163명으로 16%다. 다른 개발도상국의 평균치는 70/1000이므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이다. 모든 어린이의 4분의 1은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사망한다. 개발도상국의 평균은 10분의 1이다.
산모 10만 명 중 1700명은 출산 도중 사망한다. 남자와 여자의 평균수명은 43~44세로, 다른 개발도상국의 61세에 비해 너무 낮다. 이 나라 인구의 29%만이 보건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12%만이 안전한 물을 마시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평균치는 각각 80%와 70%다. 보건시설과 깨끗한 물이 없기 때문에 어린이들은 홍역이나 설사 같이 단순하고 예방할 수 있는 병으로 죽는다.
탈레반이 등장하기 전에도, 문맹률은 여자아이는 90%, 남자아이는 60%에 달해 중대한 문제가 되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시골에는 학교가 전쟁중 파괴되어 하나도 남지 않은 곳이 많다. 탈레반의 성차별정책은 이런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카불을 점령한 지 석 달도 안 되어 탈레반은 이 도시의 학교 63개 소를 폐쇄하여 10만3000명의 소녀와 14만8000명의 소년이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고, 1만1200명의 교사가 직장을 잃었다. 그 중 7800명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카불 대학교를 폐쇄하고, 4000명의 여학생을 포함한 1만 명의 학생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1998년 12월, UNICEF(유엔국제아동기금)는 이 나라의 교육제도가 완전히 붕괴상태이고, 소녀 10명 중 9명, 소년 3명 중 2명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외부세계는 아프간 사람들의 절망적인 상황를 거의 무시했다. 1980년대의 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주목을 받고 원조도 들어왔지만, 소련군이 1989년에 철수하는 순간 이 나라는 세계의 관심이라는 레이더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인도적 원조의 최소한 예산에도 미치지 못한 부유한 기부국가의 원조는 계속 줄어들면서 말썽을 일으켰다.
-- pp.184-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