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즐기는 삶, 이것이야말로 누구나 꿈꾸는 이상이리라. 다시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지지자불여호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호지자불여락지자(好之者不如樂之者)”인 것이다. 대명사 ‘之’를 전라도 말 ‘거시기’로 바꾸어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거시기를 아는 자는 거시기를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거시기를 좋아하는 자는 거시기를 즐기는 자만 못하다.” 여기서 ‘거시기’는 도(道), 학문, 취미 등 한 마디로 삶을 두루 가리킨다. 문제는 어떻게 삶을 즐기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건데,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위 문구를 뒤집으면 바로 답이 된다. 즐기기 위해서는 먼저 좋아해야 하고, 좋아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다. --- p.16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자극적인 축약어가 유행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마저도 귀찮아 이모티콘으로 대신하기 일쑤라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感生心)이고, 존댓말로 말다툼 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결혼하는 순간부터 예전의 가벼운 말투를 버리고 부부 상호 존댓말을 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만 싸울 일이 줄어들거니와 싸우더라도 ‘잘’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머잖아 결혼 할 그 제자에게, 그리고 그 동안 주례를 거절당한 제자들에게 꼭 한 마디만 당부하고 싶다.
“부부간에 존댓말을 써라. 그리고 ‘잘’ 싸워라!” --- p.37
하지만 현실 삶에서는 비움만이 능사가 아니다. 대체로 나이가 들어가고 처지가 좋아질수록 더 비워야 할 터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오히려 채우는 데 주력해야 하는 법이다. 이처럼 연령과 상황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모든 생명체가 날마다 섭취하고 배설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듯이, 우리는 언제나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여야 한다. 채움과 비움은 대대(待對) 개념이자 상보(相補)하는 덕목으로, 채움이 없는 비움은 공허하고 비움이 없는 채움은 추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음의 갤러리에 유화 한 점과 수묵화 한 폭을 나란히 걸어둘 일이다. 때로는 채우는 유화처럼, 때로는 비우는 수묵화처럼 살고 싶은 것이다. --- p.97
달팽이(蝸)는 두 개의 뿔(角)을 갖고 있는데, 그 뿔에는 각기 나라가 있었다. 왼쪽 뿔의 나라를 촉씨(觸氏)라 하고, 오른쪽 뿔의 나라를 만씨(蠻氏)라 하는데, 그들은 걸핏하면 전쟁을 일으켜 수만의 사상자를 내곤 하였다. 달팽이 뿔끼리의 싸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가! 하지만 그것은 우파니 좌파니 아웅다웅 싸우는 우리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훗날 지금을 돌이켜보거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본다면 말이다. 혼돈을 죽이고 남과 북, 좌와 우만이 설치는 정치판은 아무것도 생산해낼 수 없다. --- p.110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성어를 들어 동물도 효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까마귀는 부화한 지 60일 동안은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주지만, 이후 새끼가 다 자라면 먹이 사냥에 힘이 부친 어미를 먹여 살린다는 속설에서 비롯된 말이나, 실제로는 어림도 없는 허튼소리다. 어미가 하도 잘 먹여서 어미보다 더 크게 자란 새끼를 어미로 착각했을 뿐이다. 동물적 본능에 의하면, 사랑은 물처럼 아래로 내려갈 따름이지 결코 위로 올라가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물에 불을 가하여 증기로 만들면, 물을 위로 올라가게 할 수 있다. 그렇듯 인간은 내려가던 사랑을 위로 올라가게 만드는 유일한 생명체이다. 증기가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듯이, 치사랑이 바로 인류 문화의 원동력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사실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닐 성싶다. 문화의 본질이 앞 세대의 성취를 존중하고 계승하는 데 있다면, 그 출발점이 바로 치사랑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불을 발견하면서 인류가 동물과 갈라섰듯이, 치사랑을 실천하면서 인간은 ‘인간’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p.136~137
벗의 진정한 의의는 그것이 오래 되었느냐 여부에 있는 게 아니다. 마음과 뜻이 통하고 같은지 여부에 달려 있다. 아니 더더욱 중요한 것은 두 오른손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새 친구가 늘어간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지만, 오랜 벗을 잃어간다고 너무 슬퍼할 일도 아니다. 뜻이 달라지면 헤어지고, 뜻이 맞게 되면 다시 만나는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나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 하지 않았던가.
--- p.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