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탄의 왕은 극진한 예를 갖춰 중국 황실에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청을 올렸다. 변경에 위치한 이 부족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던 황실은 이 청을 수락하였다. 호탄의 왕은 종자에게 공주를 데려오라고 명하면서 몰래 몇 가지를 일렀다. "동쪽 왕국의 공주에게 우리의 땅에는 비단도 없고 뽕나무나 누에 애벌레도 없다고 이르거라. 그래서 비단옷을 계속 지어 입고 싶으면 그것들을 가져와야 한다고 하거라!" 이 말은 들은 어린 공주는 뽕나무 씨앗과 누에 애벌레를 머리 장식의 안감에 몰래 숨겼다. 국경에 이르자 국경수비대 대장이 직접 모든 짐들을 수색했다. 그러나 공주의 머리 장식에까지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결국 이렇게 해서 공주는 무사히 호탄왕국으로 갈 수 있었다.
이로써 중국은 비단에 대한 독점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사치스런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던 한 공주 때문이었다. 당연히 공주는 뜻하지 않게 중국의 배신자가 되어 버렸다. 이후 비단의 제조 기술은 서방으로 계속 전해졌다. 처음에는 중앙 아시아로, 다음엔 지중해 동쪽에 위치한 나라들로, 그리고 마지막엔 유럽으로 전해졌다. 물론 그 이후의 과정 역시 밀수와 누설과 배신으로 얼룩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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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원래 하나의 장성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원칙적으로 만리장성은 여러 시기에 걸쳐 축성된, 중국내 5만 킬로미터 이상 길게 뻗어 있는 수많은 성곽들을 서로 연결해서 만든 것이었다. 장성은 국경 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중 일부는 16개 성에 걸쳐 있다. 고비 사막에서부터 황해에 이르기까지 외부 세계로부터 중국을 보호하는 거대한 장벽 역할을 했던 이 장성은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갖가지 이유로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장성 축조로 남편을 잃은 맹 부인의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많은 중국인들이 이 장성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특히 장성을 보수하고 확장하겠다는 명 왕조의 결정은 그 이후 중국이 그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장성의 건설은 수세적이고 두려움에 찬 해결 방법이자 외부 세계에 대한 고립의 표시였으며, 이웃 국가와의 교류·교역 정책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장성 비판자들은 한과 당 왕조가 표방했던 개방 정책이 중국 문명의 번성을 위한 토대였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반해 명 왕조가 결정했던 고립·쇄국 정책은 나라의 명운을 위태롭게 한 불행한 행동이었다고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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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서부터 '약속의 땅'의 냄새가 난다. 사마르칸크, 마치 하나의 진언처럼 들리지 않는가? 발음을 하는 순간 혀끝에서 스르르 녹아버리는 듯하다. 사마르칸트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고, 대략 지도상에 어디쯤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해도 이 도시는 꿈과 환상을 자극한다. '황금의 도시', '세계의 거울', '동방의 낙원'. '중부 아시아의 로마', '땅이 해에게 선사한 가장 아름다운 용모'등의 찬사들도 지난 역사에서 인간들이 사마르칸트에 붙인 일부 수식어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그러한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첫인상은, 좋게 말해서 그저 밋밋했다. 도시 변두리에 도착해서 창고같이 단조로운 주택가와 공장 굴뚝들을 지나면서 과거 동화처럼 아름다웠다는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이 이 도시의 옛 모습을 '말끔히 씻어내고' 신생 공업 중심지로서의 외관을 부여하려고 어지간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대의 성벽과 성문들은 구시가지의 꾸불꾸불한 골목길들과 마찬가지로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고, 대신 곧게 뻗은 넓은 가로수 길이 생겨났다. 심지어 세계의 지배자 티무르의 권세를 상징하는 레기스탄 광장(사마르칸트의 중심부로서 '모래광장'이라는 뜻이다. 왕에 대한 알현식과 공공집회가 열리던 곳이다-옮긴이)옆에도 저수탑 하나가 하늘을 향해 삐쭉 솟아 있었다. 머릿속은 아직도 꿈 같은 그림들로 가득차 있건만 실제로 보이는 첫 풍경은 가히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중략)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티무르는 이 지역에서 금기시되던 인물이었다.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금지되었으나, 오늘날엔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민족 정체성 찾기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었다. 벌써 오래 전에 다시 씌어진 역사책들과 함께 '절름발이' 티무르는 우상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우즈베크 족 국가의 시조가 되었고, 그의 업적은 미화되었다. 그는 곧 위대한 권력의 대명사였다.
-- pp.412~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