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한 단어에서 멈춰 섰다.
‘무난한 삶’
만일 지나치게 무난했던 삶이, 마흔 나이의 당신을 뿌리째 흔드는 이유라고 말하면 그는 납득할까?
승희 씨는 삶을 ‘무난히’ 일궈오는 동안 모험이나 즐거움,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어머니의 반대로 포기했을 만큼 자기를 위한 삶을 억압하고, 대신 어머니가 바라는 성공을 위해 검증된 길로만 걸어왔다.
그렇게 무사히 살아왔던 ‘무난한 삶’이 마흔이라는 나이에 이르러 갑자기 흔들린다.
“이 길이 맞는 걸까? 난 뭘 위해 살고 있는 거지? 이 직장이 정말 내 삶일까?”
불현듯 의문이 스치고, 가슴에 난 구멍으로 바람이 숭숭 분다.
그때 우리는 종종 “내가 미쳤나? 지금이 어느 때인데.”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눈앞의 현실로 돌아가지만, 그러나 한 번 뚫린 마음의 구멍은 점점 커져만 간다.
비단 승희 씨만 그런 게 아니다. 마흔이라는 나이를 의식하기 시작한 모든 사람들은 이 공허함을 벗어날 수 없다. 승희 씨가 경험한 것은 ‘중년의 지진’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은 바람 앞에 갈대처럼 뿌리 끝까지 흔들리는 이때가 중년이라고 말했다. --- p.7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이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설교자 가운데 한 분입니다. 1918년생이니까 올해 98세입니다. 2014년 이 분의 책이 번역되어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90세 넘은 연세에 집필한 책입니다. 그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아무도 내게 90살 넘게 살 거라고 말해 준 적이 없다. 난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
장수에 대한 당혹감을 드러낸 말입니다.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관 뚜껑 안에서 편히 쉬어야 하는데, 아니 신앙인이니까 다르게 말해야겠죠, 지금쯤 천국에 있어야 하는데 왜 아직도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거지? 그래 거기까지는 좋아. 그거야 때가 되면 어떻게 되겠지. 그런데 도대체 나는 오늘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지? --- p.20~21
예전의 마흔이나 오십은 절대 책 안 읽었습니다. 한창 일하기 바쁠 나이였지요. 그랬던 중년이 이제는 뭔가 도움말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중년을 경험했던 우리의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답을 주지 못합니다. 살아왔던 대로 조금만 더 살면 자연스럽게 노년으로 연결되었던 과거의 중년은 현재의 중년과 또 다릅니다. 현재는 우리에게 100세 시대라는 ‘여분의 삶’이 주어지며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p.27~28
실제로 40~50대의 베이비부머들을 대상으로 노후 준비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조사해 보면 ‘경제적인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를 꺼냅니다(베이비부머의 노후 준비와 성공적 노후 관계 연구, 박현식, 한국노인복지학회, 2012년). 이들은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사람들과 어떻게 교제해야 할지, 나의 정서적인 문제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와 같은 비경제적인 문제를 언급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돈만 준비하면 된다고 알았고, 그래서 어느 정도 준비도 하고 있었지만 서서히 ‘돈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기에 이른 것이죠. --- p.35
‘생산성’은 에릭슨이 바라본 중년의 다른 얼굴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마흔에 접어들면 돈보다는 ‘돈을 벌어서 가족 앞에 당당한 나’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며, 성과보다는 ‘성과를 거둬서 회사에서 인정받는 나’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건 가족에서 시작하여 친구, 회사, 사회로 확장되며 계속 우리에게 ‘너는 쓸모 있는 존재니?’ 하고 묻게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양적인 삶에서 질적인 삶으로 관심을 바뀌게 되는 것이죠. --- p.47
40대들은 이제 ‘자기를 위한 소비’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20대에게 바라는 행동과 40대에게 바라는 행동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2015년 현재, 최소한 ‘자기를 위한 소비’라는 측면에서 두 세대는 차이가 모호해졌습니다. 40대도 자기만족이나 자기계발을 위해 투자하고 있습니다. 특히 40대는 경제력도 갖췄기 때문에 자기 성장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지요. --- p.49
중년의 지진을 느끼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확고한 ‘목표’라는 게 있었습니다. ‘좋은 대학에 합격한 나’, ‘근사한 직장에 취업한 나’, ‘연봉 빵빵한 나’, ‘집도 있고, 좋은 배우자도 만난 나’라는 방향점이 있었습니다. ‘나’라는 걸 늘 성과나 성취, 성공과 연결시켜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의미가 없어집니다. 많은 걸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손에 받아든 수돗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줄줄 셉니다. 사는 게 허무해 보입니다.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희미하게 색이 바랩니다. 서른까지 죽어라 쌓아올렸던 삶의 터전이 뿌리부터 흔들립니다. 도대체 진짜 나는 어디 있지? 불안하고, 우울하고,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올라오며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 p.52~53
마음의 지진은, 마치 우울증처럼 허무하고 허탈하고 고통스럽게 찾아옵니다. 이게 왜 왔는지 이유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 자취도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도 모릅니다. 그저 마음이 혼란스럽고 지금 하는 일이 못 견디겠으니까 사표를 씁니다. 혹은 바람을 피웁니다. 또 무슨 취미에 미친 듯이 빠집니다. 쇼핑에 집착하고, 골프에 빠집니다. --- p.58
조지 베일런트의 연구([행복의 조건])에 따르면 사람이 55세를 지나면 마치 궤도를 벗어난 것처럼 달라집니다. 더 이상 원가족(내가 나고 자란 가족)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때는 뭐가 중요해지느냐면 ‘나 자신의 삶’입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55세라는 나이는 참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불행한 아동기를 보낸 사람들은 55세 이전에 사망할 확률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8배가 높습니다. 자살로 죽고, 병으로 죽고, 사고로 죽는 것까지 다 합쳐 보면 사망률이 8배가 높다는 말입니다. 따뜻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암도 잘 걸리지 않습니다. 반면 어렸을 때 불행을 겪은 사람들은 55세 이전에 많이들 죽습니다.
상담사들은 내담자를 알기 위해 가계도를 그립니다. 가계도를 그리면서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사망했는지 꼼꼼히 살핍니다. 만일 이 집에 별 일이 없는데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면? 예컨대 심장마비나 암과 같은 이유로 죽었다면 잘 체크해 둡니다. 질병조차도 심리적인 원인에서 발병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런 정보를 정리해서 내담자를 상담할 때 활용합니다.
그런데 문제의 55세에 이르면 모든 게 달라집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이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거나 사망률에 차이가 없어집니다. 55세를 넘기면 ‘나는 불우한 아동기를 보냈고 그래서 지금도 너무 불행하고 힘들어.’ 하고 죽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제 관심사는 ‘나 자신’으로 변합니다. 마흔에서 시작된 중년의 지진이 55세를 넘어서면서 정점에 이릅니다. 마구 흔들리기 시작하는 이때가 비로소 나 자신과 얼굴을 마주하는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진짜 행복해지는 길은 무엇일까?” --- p.91~92
세컨드 에이지와 서드 에이지는 ‘성공’의 의미가 다릅니다. 세컨드 에이지 때는 ‘성취 지향’, 그리고 ‘돌격 앞으로!’라는 패러다임이 중요합니다. 반면 서드 에이지 때는 ‘자신의 행복’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세컨드 에이지의 패러다임을 갖고 정신없이 달려가다 서드 에이지의 한복판에 놓이는 경우, 잘못하면 실패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꼭 쥐고 놓지 않았던 그 낡은 패러다임 때문에 말이죠. --- p.101~102
아직 우리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릅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 시기에 시도해 보면 좋습니다. 요리도 좋고, 공예도 좋습니다. 재테크도 좋고, 놀이도 좋습니다. 이른 나이에 진로를 결정하고 앞만 보며 달려왔던 20~30대와 다르게, 이때는 분업 이전의 인간, 즉 모든 걸 자기 손으로 해결했던 로빈슨 크루소처럼 일단 다 해보는 게 좋습니다. --- p.109
마흔 이후 우리는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탐색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어떤 길이 나에게 맞는지 잘 모릅니다. 여기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A가 내 길일 수도 있고, B가 내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A가 맞는지, B가 맞는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감정 센서(sensor)가 알려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알람 장치를 갖고 있습니다. 이 알람 장치는 자기 감성, 즉 내 마음속에서 울리는 종입니다. A의 길로 걸어갔더니 느낌이 좋습니다. 나랑 잘 맞습니다. 그럼 게이지가 상승합니다. ‘심리상담사’라는 직업이 좋아 보여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실제로는 상담보다 코칭 점수가 더 높게 나올 수 있습니다. 그걸 알려주는 게 마음의 울림입니다. 주파수가 맞으면 딸랑딸랑 종이 크게 울립니다. 종소리 듣는 훈련이 잘 되어 있다면 자기 마음에 귀를 기울일 준비를 마친 거죠. --- p.125~126
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영원히 늙지 않는 어린아이가 산다. 이 내면의 아이를 보살피고 일깨우는 것이 성공이고 소명이다.”
이 내면의 아이는 진짜 하고 싶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이 아이는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융은 그 일이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융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닙니다. 존 가트맨(John Mordecai Gottman)이라는 유명한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필드로 나가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의 결론도 융과 똑같습니다.
“인생 후반기의 성장은 내면의 아이를 발견하고 돌보는 데 있다.”
--- p.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