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현대 문화 전반에 다양하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쳐, 현대인의 일상을 다윗에 빗댄 은유가 거의 매주 매스컴에서 등장하다시피 한다. 이를테면 유명 인사들의 성추문은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 권력 승계를 둘러싼 다툼은 다윗과 사울의 대립,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승부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된다. 가진 것 없는 약자에서 시작해 권력 남용자, 동성 친구 간의 우정, 시를 쓰는 군주, 영원한 왕 등등을 언급할 때면 늘 다윗이 인용되곤 한다. 다윗은 자신의 이야기는 물론 수많은 영역에서 영향력 있고 독보적이며 항구적인 명성을 남겼다. --- pp.17-18
그의 재능에서 탁월한 점은 무엇인가? 다윗이 지닌 능력은 근시안적인 사람은 결코 볼 수 없는 먼 미래를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양 생생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는 갑옷과 칼로는 전혀 승산이 없음을 간파하고 다른 작전을 구상한다. 이후 사울의 추격으로 더 이상 이스라엘에 머무를 수 없게 되자 적국으로 달아난다. 다윗은 산간벽촌에 불과했던 예루살렘에서 미래의 수도를 본다. 예배 처소인 성막이 이리저리 옮겨다는 것을 보고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겠다고 다짐한다. 음악가이자 시인으로서의 명성도 그의 이상가적 기질을 부채질한 듯하다. 그는 정해진 길을 답습하는 대신 무에서 해법과 가능성을 창출해낸다. --- p.49
대개 드라마의 주인공은 단 한 사람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 로미오와 줄리엣, 다몬과 피디아스(깊은 우정의 대명사-옮긴이), 나오미와 룻(사이좋은 고부관계의 대명사-옮긴이)만 보더라도 그렇다. 하지만 다윗과 요나단, 다윗과 밧세바, 다윗과 사울, 다윗과 요압, 다윗과 미갈, 다윗과 솔로몬의 관계에서 볼 수 있듯, 다윗의 인간관계는 다면적이다. 다윗은 자신의 삶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사람들과 폭넓은 관계망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관계들은 거의 파괴와 절망으로 점철되고 만다.
그렇다고 폐허만 남는 것은 아니다. 다윗의 삶에는 항상 또 다른 길이 존재한다. 다윗은 자주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지만 그것도 잠시 뿐, 이내 하느님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인다. --- p.71
다윗은 잘 들을 뿐만 아니라 세심하게 반응해줄 줄도 아는 사람이다. 그가 도망칠 때 놉으로 피신해 제사장으로부터 먹을 것을 제공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꼬투리 잡아 사울이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였을 때 다윗은 마치 그것이 전부 자기 탓인 양 괴로워한다. 다윗은 강하지만 일차원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는 진정한 지도자답게 다른 사람들의 걱정과 근심을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러나 담담하게 경청해준다. 앞서 성경에서는 등장인물의 첫 발언이 중요하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첫 발언이 그 사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다윗은 맨 먼저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어떤 대우를 해주느냐고 물었다. 이는 그가 야심가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에 앞서 그가 기름부음 받던 장면을 기억해야 한다. 사무엘이 그를 불러 형들 앞에서 높여주었을 때 다윗은 침묵했다. 다윗의 리더십에 있어서 그의 용맹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침묵과 수용의 자세, 그리고 경청의 능력이다. --- pp.120-121
만화경처럼 변화무쌍한 다윗의 내적 갈등과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일은 아무래도 현대인의 감성이 개입될 여지가 크다. 하지만 왕으로서의 다윗과 그의 통치 과정을 이해하려면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영혼을 지닌 다윗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관점을 재조정하는 작업이 수반되어야 한다. 다윗 한 사람이 감정적으로 휘청거린 이 사건을 통해 향후 전 이스라엘의 역사가 달라진다. 이제 그는 자신의 강점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초 위에 왕국을 건설할 것이지만, 그의 약점은 균열을 남겼고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대개 그렇듯이, 자식과의 관계만큼 어려운 부분도 없다. 다윗의 이야기 중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밧세바 일화는 그의 능력과 결함이 얽히고설킨 결정체다. 다윗의 아들들은 서서히 부왕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그의 권좌를 위협하고 그의 마음을 무너뜨릴 것이다. --- pp.178-179
다윗은 자식들의 비행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을까? 물론 뼈아픈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암논이 다말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도 밧세바와 불륜을 저질렀다. 자신의 불륜 역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의 살인이라는 참극을 불러왔다. 다윗은 자식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다중적인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암논의 성적 욕망이나 다말의 임기응변, 압살롬의 간교함 모두 다윗을 구성하는 성격의 일부가 아니던가. 다윗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모순적인 성격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 모순적인 성격은 다윗 자신에게는 물론 그를 빼닮은 자녀들에게도 처참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아마 그 순간 다윗의 뇌리에는 우리아 살해 사건이 초래한 나단 선지자의 예언이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내가 너의 집안에 재앙을 일으키리라.” --- pp.194-195
다윗의 생애를 주제로 한 걸작인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은 다윗을 단순히 하나의 제한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재조명했다. 포크너는 단일한 시각만으로 한 인물의 삶을 평가하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화자와 관점을 수시로 바꿨다. 포크너 소설의 주인공 서트펜처럼 다윗도 자신의 가정을 파괴했으며 그 결과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겉으로는 무덤덤하게 기술된 것 같지만 속으로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성경과는 달리 포크너의 산문은 인물들의 내면을 훨씬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어(그들의 독백이나 잇따라 등장하는 생각의 과정을 따라가는 여정을 통해) 다윗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윗은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과 선택을 받았음을 확신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그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대가이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다윗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치렀던 혹독한 대가를 떠올리며 그런 유혹을 뿌리친다. 소설가들이 다윗에게 그토록 끌리는 이유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미묘하게 얽혀 있고 다채로우며 난해한 인물의 초상이 복잡다단한 현대문학의 성향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 p.253
‘다윗은 누구다’라고 단편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다윗은 다만 지금까지 살펴본 다양한 모습의 총체일 뿐이다. 기존 종교는 인간의 영혼을 부분 부분으로 해체시켜 분석하려는 유감스러운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이렇게 해서는 전체적인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어느 한 부분, 특히 찬양받는 업적에만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 자체로 돌아가면 좀 더 있는 그대로의 다윗을 만날 수 있다. 성경에는 결점투성이 인간 군상과 과장된 거룩함의 이미지를 확 달아나게 만드는 문제적 상황들로 가득하다. 사실 성경 전체가 레너드 코언의 말처럼 “일그러진 할렐루야”다. 가족 간의 갈등, 야망의 대가, 경건에 가려진 위선, 고상함과 야만성을 동시에 지닌 인간의 양면성, 이 모든 것이 히브리 성경 페이지마다 원색적으로 펼쳐진다. 그런 성경이 인간 경험의 총체인 메시아를 예표할 사람으로서 인간적인 열정에 대해 초연한 성자를 제시할 리 만무하다. 그리고 인간적인 표현과 감정으로 치자면 다윗에 필적할 자가 없다.
--- pp.277-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