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부의 독일 철학에 대한 공통의 견해는 …… 그때가 퇴조와 정체의 시기라는 것이었다. 위대하고 창조적인 ‘관념론의 시대’는 헤겔의 죽음과 더불어 지나갔으며, 다만 철학보다는 경험 과학과 기술적 진보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실재론의 시대’로 계승되었을 뿐인 것으로 보였다. …… 하지만 19세기 후반부는 혁명적이었다. 왜냐하면 이때는 철학에 대한 안정되거나 동의가 이루어진 정의가 존재하지 않고 그 분과에 대한 다수의 서로 갈등하는 개념들이 존재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분과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물음들을 물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경험 과학과 어떻게 다른가? 왜 우리는 철학을 해야 하는가?” --- p.15~16
“그 뿌리가 칼 뢰비트의 큰 영향력을 지닌 [헤겔에서 니체로]로까지 추적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에 따르면, 19세기의 독일 철학은 본질적으로 청년 헤겔주의자들, 맑스, 키르케고르 그리고 니체에 의한 헤겔 철학의 혁명적 변형에 관한 이야기다. 이 변형은 두 개의 주요한 철학적 전통, 즉 맑스주의와 실존주의를 낳았는데, 그것들은 19세기 철학의 주된 지적 유산으로서 간주된다.” --- p.22
“일단 우리가 뢰비트와 헤겔의 유산과 단절하게 되면, 19세기 독일 철학에 대한 우리의 그림은 현저하게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더 이상 1831년에서의 관념론 전통의 종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그 세기말까지 확대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관념론 전통에 대해 쓸 수 없으며, 오히려 제2의 경쟁하는 전통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맑스주의와 실존주의가 그 세기 후반부의 주요 지적 운동들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다른 많은 운동들, 즉 후기 관념론, 역사주의, 유물론, 신칸트주의 그리고 페시미즘을 포함해야 한다. 마지막이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으로 우리는 더 이상 쇼펜하우어를 독불장군처럼 취급할 수 없으며, 그를 19세기 후반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서 인정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일군의 사상가들에 대한 그의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니체는 단지 그 사상가들 가운데 하나의 예일 뿐이다.” --- p.29
“헤겔의 죽음 이후 10년이 지난 1840년대가 시작되자 철학자들은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겪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분과를 19세기 처음 몇십 년 동안 널리 받아들여진 전통적인 용어들로 정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몇 가지 매우 어려운 물음들을 스스로 묻기 시작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철학은 경험 과학들과 어떻게 다른가?” --- p.35
“비록 오늘날 대체로 잊히긴 했지만, 이른바 ‘유물론 논쟁’은 19세기 후반부의 가장 중요한 지적 논쟁들 가운데 하나였다. …… 유물론 논쟁에 의해 제기된 주된 물음은 그 권위와 명망이 이제 의문을 넘어서 있는 근대 자연 과학이 과연 필연적으로 유물론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것이었다. 유물론은 일반적으로 오로지 물질만이 존재하고 자연의 모든 것은 오직 기계론적 법칙들만을 따른다고 하는 교설로 이해되었다. 그러한 교설이 참이라면, 신도 자유의지도 영혼도, 따라서 불사성도 존재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 믿음들은 도덕과 종교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논쟁은 극단적인 딜레마, 즉 과학적 유물론이냐 아니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신앙의 도약’이냐의 딜레마를 제기했다. 그것은 이성과 신앙의 오랜 갈등이 이제 이성의 역할이 자연 과학에 의해 수행되는 곳에서 나타난 최신 버전이었다.” --- p.91
“1872년 8월 14일에 베를린 대학 총장이자 그 시대의 가장 저명한 생리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에밀 뒤 부아-레몽……의 강연은 그 시대의 자연 과학의 성취들, 즉 자연 과학이 얼마나 멀리까지 나아갔으며, 얼마나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고, 또 그 진보에 대한 어떤 장애물들이 있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시도였다. 뒤 부아-레몽은 근대 과학자를 승리의 행진에로 나아가기 전에 이제 자기의 영토를 조사하고 있는 세계 정복자에 비교했다. …… 하지만 그날 청중은 충격에 빠졌다. 자연 과학의 힘을 찬미하기보다 뒤 부아-레몽은 그 한계를 강조했다. 청중들은 …… 지식의 한계에 대해 읊조리는 오랜 퓌론주의적인 회의주의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뒤 부아-레몽은 모든 과학적 지식에 대해 극복할 수 없는 두 가지 한계, 즉 물질의 본성 그리고 의식과 뇌 사이의 연관이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 그는 자신의 연설을 엄숙하고 강조적인 라틴어, 즉 ‘우리는 알지 못할 것이다’를 뜻하는 ‘이그노라비무스’로 끝마쳤다.” --- p.157~158
“19세기가 역사의 시대라고 불리는…… 것은 지적인 분과로서의 역사가 독자적인 권리를 지니는 학문이 되었기 때문이다. …… 18세기가 끝나갈 때에도 철학자들은 여전히 지식의 수학적 패러다임을 신봉했는데, 그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우리가 증명하는 것만을 알며, 지식은 보편성과 필연성을 요구한다. 이 패러다임은 볼프주의 전통과 칸트주의 전통 둘 다에게 공통적이었다. 그것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칸트가 오직 한 분과 안에 수학이 존재하는 만큼만 그 안에 학문이 존재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에 의해 완전히 명시적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엄밀한 기준에 의해 역사는 학문일 수 없다. 역사의 명제들 가운데 어느 것도 논증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보편성과 필연성을 결여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특수하고 우연한 사건들에 관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9세기 말 무렵에 수학적 패러다임은 자기의 장악력을 상실했다. 역사는 독자적인 권리를 지닌 학문이 되었다. 미스터리하긴 하지만 설명될 수 있는 이유들로 인해 논증 가능성과 보편성 그리고 필연성은 더 이상 지식의 필요조건으로서 여겨지지 않았다. 어쨌든 특수하고 우연적인 사실 문제들에 관한 역사적 명제들마저도 학문적일 수 있었다.” --- p.212
“쇼펜하우어 페시미즘의 중심 테제는 충격적인 만큼이나 단순하다. 즉,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무는 존재보다 더 좋으며, 죽음은 삶보다 더 선호할 만하다.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철학의 역사에서 삶이 그러한 파멸적인 평결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마치 쇼펜하우어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듯했다. 너희는 죽는 게 더 좋으며, 너희의 분투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너희의 좀 더 깊은 모든 열망―더 좋은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너희의 노력―은 아무 효력도 없다. / 쇼펜하우어 페시미즘의 충격으로부터 19세기 말의 가장 격렬한 철학적 논쟁들 가운데 하나, 즉 페시미즘 논쟁이 발생했다.”
--- p.250~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