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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다

흐드러지다

: 혼자여서 아름다운 청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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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3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268쪽 | 380g | 138*190*20mm
ISBN13 9791187119692
ISBN10 1187119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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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신혜정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내일쯤 공항을 달려갈 수 있는 가벼운 영혼의 소유자. 건강하고 정의로운 세계를 꿈꾸는 몽상가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래서 잡다한 지식에 관심이 많다. 시를 쓰지만 시집이 아닌 과학책에서 시적 영감을 얻을 때가 많은 괴짜. 호기심이 많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본 경험들을 소중히 여긴다. 그렇게 경험을 통해 천천히 스미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풍경이든.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라면의 정치학》이 있고, 국내 핵발전 지역을 기행한 후 쓴 산문집 《왜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나》는 ‘2015년 올해의 환경책’으로 선정되었다. 옮긴 책으로 《시크한 그녀들의 사진촬영 테크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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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모든 가전기기들에서 해방되어도 좋겠다. 잠시라도 떨어지면 불안해지는 스마트폰과 공회전처럼 켜두는 텔레비전의 소음, 감흥 없는 음악, 습관적으로 켜둔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오롯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 ---「프롤로그」중에서

‘흐드러지다’라는 말 앞에서 가끔 속수무책일 때가 있다. ‘매우 탐스럽거나 한창 성하다’라는 뜻의 이 형용사 앞에서 나는 가끔 무너진다. 봄날 누군가의 집 마당에서 풍겨오는 라일락 향기 같은 것을, 이 말은 담고 있다. --- p.20

스스로 정지했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너의 이야기들을 꺼내보곤 했어. 정지된 것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야. 바람에 수없이 흔들리면서 피어나는 들꽃처럼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까지 예민하게 느끼면서 나는 살아있고 싶었어. --- p.27

모국어로부터 자유로워진 그곳에서,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그곳에서 나는 벙어리였다. 입을 닫자 글이 쏟아졌다. 결국 내가 쏟아내야 할 에너지의 양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 하고 싶던 말, 했어야 했던 이야기들은 그 질량을 그대로 유지한 채 세상으로 흘러나왔다. --- p.35

습관이란 어쩌면 한 사람을 말해주는 가장 큰 증거일지도 모른다. --- p.41

오래된 건물이 주는 감성이 있다. 여전히 그것들이 건재하고, 여전히 사람들이 그 건물에 살고, 장사를 하고, 여전히 예배가 있는 교회로 기능하는 것. 그런 모습은 왜 불시에 발길을 멎게 하는 걸까. 몇백 년은 된 건물 앞으로 아스팔트가 깔려있고 그 위로 자동차가 지나가는 광경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구경하는 관광상품에 참여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했다. --- p.53

경계를 나눈 것은 인간이지만 땅에는 그 구분이 없다. 물과 바람, 동물에게 그 경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되어 그 경계에 따라 삶의 질이 판이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일까. --- p.84

가끔 불안에 대해 생각한다. 이토록 불안과 의심이 많은 내가 어떻게 낯선 곳들로 떠날 마음을 그렇게 쉽게 먹을 수 있는지, 생면부지 낯선 이의 집에 머물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어쩌면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그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한 연습을 하는 건 아닐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 p.106

혼자 하는 여행의 또 다른 묘미는 새로운 ‘사람’들로 인해 채워진다는 데 있다. 우연히 누군가를 알게 돼 이야기하며 함께 걷고, 때로 함께 음식을 먹은 일화들을 모두 연결하면 여행의 경로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스탄불에서 택시 기사가 불러준 지명을 연결하자 공항이 나타났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홀로 떠났던 이야기는 길에서 마주쳤던 모든 당신들로 인해 완성된다. 돌아와 마음을 설레게 하는 얼굴들, 다시 가서 만나야 할 당신들, 꼭 만나고 싶은 이름들… 당신, 당신들과 함께 흐드러졌던 그 시간들. --- p.117

사물들이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비우는 여행이 될 거라던 작은 예감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다. 비우는 것은 결국 채우는 것이었을까? 텅 빈 것 같았던 마음이 무언가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내가 했던 것은 그저 그 낡은, 오래된 의자에 머문 것뿐이었다. --- p.119

여행하는 사람은 언제고 이런 비약에 빠질 준비가 되어있다. 모든 것이 온통 새로워서 말을 걸고 싶고, 그의 지나온 날들이 궁금해지고, 다음 날이 되면 그의 안위를 생각하고, 그리워서 미치겠는 순간의 기록들처럼. --- p.137

언젠가 내가 발음한 단어들이 나를 그곳으로 안내할 것이다. --- p.184

여행은 일부러 고독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침묵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요가 그리워질 때마다 여행을 계획했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돌아보면 고독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사람처럼 짐을 쌌지만 정작 여행지에서는 많은 이 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친구가 되기도 했다. 결국 혼자가 아니란 것을 깨닫고 다시 인천공항으로 들어올 때면 또다시 돌아온 자의 고독이 반복되었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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