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나가보니 소파 위에서 찹이 강아지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마음이 약해져서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려는 찰나 “한심한 쫌팽이 새끼”라는 잠꼬대가 들렸다. 찹의 신발을 세탁기 속에 던져버렸다.---p.20
다음 날 아침 모텔에서 깨어났을 때 노출광이 윤식이에게 “넌 슈퍼 카운터에 놓인 천하장사 소시지쯤 돼” 하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윤식이가 신체 조건으로 모욕을 당한 게 아닌가 싶어 잠시 움칠했다. 그러나 “한 번 까먹고 버리는 존재”라는 해설이 이내 뒤따랐기 때문에 안도했다. 윤식이는 실연의 아픔으로 인해 이마에 종기가 났다.---p.22
그녀가 자신은 30년 가까이 혼자 살아왔기 때문에 더 이상 외로운 것은 싫다고 말했다. 나는 이미 30년이나 혼자 살아왔으니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위로했다. 아줌마가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말라며 코를 풀었다. 외로움이란 빚처럼 막무가내로 불어나는 것이라고 했다.---p.29
예상치 못한 사고였다. 나는 아직까지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현실이란 내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는다.---p.34
지예는 우리의 관계를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가 말없이 앉아 있자 지예가 헛기침을 했다. 나는 감기 걸리기 전에 들어가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지예는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었다.---p.……) 지예는 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어쩐지 흥미가 떨어진다.---p.37
내가 수정란이었을 때 사라져버린 남자와 카페에 마주 앉아 “날씨가 참 따뜻하지요”라느니, “참치야채죽 먹어봤습니까?” 하는 대화를 나누는 것은 너무 질척거리는 일이다. 집 나간 아버지와 20년 만에 상봉하는 아들이라는 걸 들키느니 차라리 원조교제 중인 게이 커플로 보이는 게 낫겠다.---p.40
나는 아직 유리를 좋아한다거나 하진 않지만 그 애에 대해 궁금하긴 하다. 그리고 그 애는 늘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해대서 함께 있으면 어쨌든 유쾌하다. 무엇보다 별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 여자라는 게 좋다.---p.51
나는 초연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핸드폰을 두 손으로 붙잡고 “만나서 얘기하자”며 애걸복걸하는 중이었다. 유리는 지금은 얼굴을 보고 얘기할 때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마음이 변한 이유를 알려달라고 소리쳤다. 그 애는 “마음이 변한 것이 이유”라고 간단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p.77
인생을 즐겨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은 기념으로 그을린 피부의 여자와 키스를 했다. 온갖 냄새가 섞여 썩 좋지는 않았다.---p.80
부모에게 버림받고 헤어진 애인에게 조롱받는 인생이라니. 나는 세상을 너무 순진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p.88
세상이 엉망으로 돌아간다. 우리 집에는 꽃 화분에 담배꽁초를 비벼 끄는 심술궂은 난쟁이가 살고 있으며, 다른 여자와 연애 중인 아버지는 20년 만에 나를 찾아와 며칠 전에 담근 김치를 좀 나누어 달라고 염치없는 부탁을 한다. 과외 학생은 방금 내게 ‘아파트 옥상에 올라와 있다’는 문자를 보내왔으며, 친구는 유부녀와 연애를 시작했다. 게다가 치약까지 떨어졌군.---p.98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동안, 달배 씨는 체리의 어머니가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간 지 두 달이 채 안 되었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체리가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뻔하지. 또 누군가를 잃게 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 아니겠는가!---p.117
잠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일어났다. 벌써 10월이라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나는 미친 말처럼 달리는 시간의 꼬리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벼룩이 아닐까. 좀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할 텐데. 아르바이트와 과외에 치이는 이런 삶 말고, 더 그럴싸한 무언가를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p.143
사랑의 시련에 빠져 있는 윤식이는 도인과 같은 말투로, 사람은 심장이 뜨거운 동물인데 어찌 완벽하게 쿨한 사랑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쿨한 사랑이란 픽션에나 등장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과연 그럴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쉽고 쿨’하게 끝날 수 있는 연애가 아니라는 것이다.---p.146
나는 의미 있게 산다는 것에 대해 잠깐 생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미 있게’보다는 ‘즐겁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혼자 살게 된 주인공(스무 살의 남자 대학생)의 집에 어느 날 찹이라는 난쟁이 요정이 찾아와 주인공, 찹, 강아지가 동거를 시작한다. 아직 크게만 느껴지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뻔뻔하고 무심한 듯 행동하는 찹과 소소하게 말썽을 일으키는 강아지가 채워주고, 학교 친구인 윤식도 대학 신입생이 겪을 법한 평범한 일상을 나누며 위로를 주는 인물이다. 한편 주인공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죽집 서빙과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동물병원에서 만난 중학교 동창 지예와 학교에서 노출광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여자애(유리) 사이에서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소설의 중반으로 가면 그동안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아버지와 패션 디자이너인 게이 외삼촌이 등장해 관계를 이어가며 평범하지 않은 가족의 형태를 발전시켜간다.
전아리라는 소설가의 글을 꽤 오랫동안 지켜봐온 한 사람으로서(그녀가 청소년이던 시절, 잠시 머물던 문예 잡지의 편집위원으로서 그녀에게 소설 연재를 의뢰한 적이 있다) 나는 그녀의 소설이 꽤 조숙하다는 느낌을 일찍부터 받아왔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고통이라는 주제에 대해 남보다 일찍 눈을 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러한 생채기가 본인에게 너무 오래 머물러 있지 않기를 바라온 것도 사실이다.(작가가 되고자 하는 자에게 그것을 바란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기갈인가?) 당연하게도 나는 그녀가 만들어내는 산천어들의 방향을 멈추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장을 멈추고 그곳에서 아플 때까지 아프겠다는 한 소녀의 언어들은 그사이 독자들에게 성장에 관한 매혹적이면서도 유려한 미궁들을 보여주었을 테니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녀가 여전히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거나 여전히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로 건너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소설은 바슐라르적인 몽환으로 가득하다. ‘물과 꿈’에 대한 한 편의 몽상록처럼 이 소설은 고백으로 이루어진 물목들이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알겠지만 전아리만큼 성장통에 대해 이토록 솔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소설적 연애’를 시도하는 작가는 드물다. 그녀가 만드는 세상이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여서 다행이다. 김경주(시인, 극작가)
사랑스럽지만 종종 머릿속이 하얘질 만큼 발칙한 유머, 예고 없이 급소를 강타하는 뜻밖의 페이소스. 전아리 소설이 ‘미스터 찹’을 빼닮았다고 느끼는 건 나뿐일까? 세상의 무거움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는 포즈도, 성장이나 올바름에 대한 강박도 없이 그저 정직하게 깔깔거리고 눈물을 머금어가며 ‘웃픈’현실 속을 또박또박 걸어가는 젊음들의 일기. 때로는 너절하고 때로는 눈부시지만 무엇보다 꾸밈없는 방식으로 피로를 풀어준다는 게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다. 하루의 끝, 푹신한 소파에 기대 절친과 전화로 하염없이 수다를 떨면서 마시는 차가운 맥주 한 캔처럼 편안하고 부담이 없다. 처음엔 그 4차원적인 기발함으로, 다음엔 능수능란함으로 놀라움을 주던 이 작가가 도착한 경쾌한 리얼함이 나는 부럽다. 윤이형(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