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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세계

불타는 세계

리뷰 총점8.7 리뷰 11건 | 판매지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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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3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556쪽 | 716g | 146*210*35mm
ISBN13 9788994015903
ISBN10 8994015906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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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 자신으로 나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나는 영원히 사라진 존재였고, 사라지는 게 그토록 수월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 모두와 맺은 내 관계가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 실감하게 해주었다. --- p.61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구름이 있고, 우리는 그 구름들에 이름을 달아주지만 그 이름들이 창출하는 분류가 언제나 실존하는 건 아니다. 해리의 내면에는 폭풍들이 살고 있었다. 사방으로 다니며 파괴를 일삼는 회오리바람과 토네이도들이 있었다. 그녀의 시련은 뿌리 깊었고 어른이 되었을 때 시작된 게 아니었다. 거울 앞에 서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던 그녀 모습이 기억난다. 아마 열다섯인가 열여섯 때였을 것이다. --- p.92

전부는 아니라도 많은 여자들이 바람직한 성적 대상으로서의 전성기가 지난 후에야 각광을 받았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여성 미술가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뉴욕 갤러리들이 남자들보다 여자들의 작품을 훨씬 덜 다룬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 갤러리들의 절반을 여자들이 경영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작품을 다루는 곳은 시내 모든 갤러리의 20퍼센트 언저리에 머문다.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미술관들도 나을 게 없고, 현대 미술에 대해 다루는 잡지들도 마찬가지다. 여성 예술가라면 누구나 남성 기득권의 음험한 확산에 맞닥뜨리게 된다. 거의 예외 없이 남성의 예술작품은 여성의 예술작품보다 훨씬 더 값이 비싸다. 달러가 말해준다. --- p.118

그녀는 긴 손을 테이블보 위에 놓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나는 있잖아요, 날아다니면서 불을 뿜고 싶었어요. 그게 내 절실한 소원이었지만 금지된 것이었죠. 아니, 내겐 금지된 거라고 느껴졌어요. 스스로에게 날아다니면서 불을 뿜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리는 데까지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 p.133

피니는 내 허리에 팔을 둘러 안아주었다. 그의 손길이 느껴진다. 이 따뜻한 제스처, 이 작은 선행을 기억하고말고. 그 순간, 나는 우리와 함께 오기를 거부했던 브루노 때문에 걱정한다. 어쩌면 피니의 손길이 브루노, 나의 거친 연인을 떠올리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의 손길, 그 덜컹거리는 목소리, 그의 농담들로 다시 살아나지만, 그는 말했다. 그 미술계의 지랄이 끔찍하게 싫다고. 시의 세계도 상당히 안 좋은데, 그보다 더 나쁘다고. 하지만 시에는 돈이 없다고. 그저 자존심뿐. --- p.233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은밀한 삶에 대해 내게 말해줬어야 해, 펠릭스, 당신이 쫓는 은밀한 삶들. 그건 분명 나와 상관이 있었어. 당신이 틀렸어, 펠릭스. 하지만 당신은 아기들을 원했지, 그렇지? 그래. 그 아이들은 나보다 사랑하기가 쉬웠지. 문까지 뛰쳐나와서 잠옷 바람으로 팔짝팔짝 뛰며 흥분해서 헐떡거리던 메이지. 아빠가 왔어. 여기 왔어. 아빠! 아빠! 잡아도 잡히지 않는 아버지들. 우리는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가. --- p. 240

하지만 오늘밤 여기 책상 앞에 앉아 강물을 내다보고 있자니-겨울, 밤, 빛나는 도시-내가 이름 붙일 수 있는 대상이 없는 비탄을 느낀다. 펠릭스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다. 방금 그것이 세차게 나를 덮쳤다, 뼈아픈 비탄, 하지만 무엇을 슬퍼하는 걸까? 단순히 내가 지나온 세월보다 내 앞에 남은 세월이 너무 적기 때문일까? 고개를 숙이고 걷던 해리엇이라는 이름의 아이를 위해서일까? 내 앞날의 모습인 늙은 여자를 위해서일까? 야심의 분노가 그토록 두들겨 맞고도 아직 내 안에 남아 있어서일까? 내 안에 흔적을 남긴 유령들을 위해서일까? --- p.251

아니, 해리와 그 시를 사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끝나지 않는 프로젝트에 대해 한 판 대결을 하고 나면, 나는 비실비실 기어 나와 길 건너 나의 굴에 처박혀 상처 난 리놀륨 장판 위에서 상처를 핥고는, 또다시 그녀의 침대와 이제까지 알았던 어떤 여자 보다 더 세게 안아주는 그녀의 근육질 팔 안으로 개처럼 기어들어 오곤 했다. 그때는 말할 수 없었지만, 시에 대해서는 그 할망구의 말이 옳았다. 그 시는 나를 얼마든지 어두운 숲속으로 데리고 들어 갈 수 있었지만 결코 단테의 천국으로 데려가주지는 못할 터였다. 하지만 그 시를 포기한다는 건 나를 포기하고, 나의 자아를 포기하고, 나아가 야구 경기가 끝난 날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펜스 너머로 날려버린 홈런을 다시 생각하던 열 살짜리 브루노 클라인펠드를 포기하는 일이었다. --- p.256

우리는 우리의 범주들 속에 산단다, 메이지, 그리고 그걸 믿지. 하지만 그 범주들은 뒤죽박죽이 되는 경우가 많아. 그 뒤죽박죽이 된 상태가 바로 내 흥미를 끌어. 그 지저분한 상태가 말이다. --- p.320

나는 불타오르고 우르릉거리고 포효하고 싶다. 나는 숨고 흐느껴 울고 우리 어머니에게 꼭 매달리고 싶다. 그리나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 p.338

그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한 번의 전시회에서 나를 입고 싶다 이거죠. ‘입는다’는 건 좋은 표현이었다. 그렇다고 말했다, 바로 그거라고, 다만 그를 ‘입음’으로써 내 안에서 뭔가 다른 걸 찾아낼 지도 모른다고. 그게 내가 설명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는 이를 핥더니 그 무언가란 뭐가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모른다. 모른다. 나는 모른다. --- p.355

펠릭스를 하늘처럼 우러러보고 사랑했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죽은 남편에게 질투를 느끼는 브루노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에게 맞서기가 그토록 힘들었던 건 그를 향한 그녀의 미친 사랑 때문이었다고. 펠릭스는 해리로 하여금 자신이 흥미롭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느낌을 주었고, 그녀는 그가 원한다고 생각한 모습대로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었다. “이게 내가 하려는 말이야, 레이철. 우리는 뭘까? 펠릭스는 무엇이었고 나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내 안에 있었어.” 그녀는 언제나 펠릭스가 원하는 것들을 읽고 그녀 자신을 굽혀 그에게 맞추려 했으며, 그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이 내면 깊이로부터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p. 388

“그래서 그 차가운 가면들이 내게 필요했던 거야, 알겠니. 차갑고, 딱딱하고, 무관심한 가면, 일어나서 멍청한 자들을 칠 제왕 같은 페르소나. 그는 내가 룬과 함께 있을 때 나와.” 그래서 그녀는 다중인격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왜냐하면 복수성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 p.390

거리로 나와 손을 들어 택시를 잡으려고 할 때도 나는 여전히 얼어붙은 채 내가 잃어버리는 것들, 도시와 하늘과 보도, 빠르고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것의 색채를 경이로운 마음으로 돌아보면서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모든 색채, 이름은 모르지만 충분히 인지하는 색까지도 너와 함께 사라질 거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상실. --- p.517

세상을 떠나는 우리도 여전히 머무르기를 바랄 수는 있다.
할 일이 더 있다. 내게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세상이 있지만, 난 그걸 결코 보지 못하리라.
--- p.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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