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나라 사람의 본거지는 풍요로운 동쪽의 땅이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재화를 중시했다. 은나라의 종교는 다신교였고, 신들은 인간적이었다. 이 신들은 술이나 맛있는 음식과 같은 공물을 좋아했다. 은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왕조를 ‘상(商)’이라 불렀다. 3천 년 전 은 왕조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사람들은 토지를 빼앗긴 망국의 백성, 말하자면 고대 중국판 유대인이 되었다. ‘상인(商人)’이라 자칭한 은나라 사람들은 각지에 흩어진 뒤에도 서로 연락을 취하며 재물 교환을 새로운 생업으로 삼았다. 이것이 ‘상인’ ‘상업’의 어원이다. 서구의 유대인이 학예에서 성공했듯이, 은나라 사람의 자손들도 학자를 배출했다. 기원전 6세기의 공자도, 기원전 4세기의 장자도 은나라 사람의 자손이었다.
한편 주나라 사람의 선조는 중국 서북부의 유목민족과 관계가 깊어서, 혈통도 기질도 유목민족적인 데가 있었다. 은나라 사람이 패와 깊은 관계가 있었듯이, 주나라 사람들은 양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주 무왕을 도와 은주혁명의 주역이 되었던 주나라의 태공망 여상의 성은 ‘姜(강)’이다. 자형도 자음도 ‘양’과 통한다. 주나라 사람들에게 양은 그야말로 보물이었다.
일반적으로 농경민족은 땅에서 잡초나 나무나 벌레 등의 생명이 쑥쑥 솟아 나오는 자연환경에서 살고 있는 까닭에 지역밀착형 다신교가 되기 쉽다. 한편, 광막한 대초원이나 사막지대를 이동하면서 사는 유목민족은 하늘에서 큰 힘이 내려온다는 보편적인 일신교를 갖기 쉽다. 유목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주나라 사람들은 유일 지고의 신인 ‘하늘’을 믿었다. 하늘은 이데올로기적인 신이며, 물질적인 공물보다도 선과 의, 예의와 같은 무형의 선행을 좋아한다. 은나라 사람들은 신을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즐겨 묘사했지만, 주나라 사람들은 유대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유일신을 그림과 조각상으로 그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만들지 않았다.
--- '다신교와 지고의 신이 만나다' 중에서
중국어에는 "고향의 달이 가장 둥글다"는 속담이 있다. 달이 둥글기는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인데, 고향의 달은 유달리 둥글고 아름답게 비친다는, 중국인의 강한 향토애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말이다. 그런 중국인도 일단 고향을 떠나면 사고를 싹 바꾼다.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민들레 씨앗처럼 각지를 유랑하다가 국내든 국외든 좋은 땅을 발견하면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 그런 뒤에는 상황에 따른다. 손자 때까지 머무를 수도 있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나아가 다른 신천지를 향할 수도 있다.
중국어에서는 "어디에 묵고 있습니까?"와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를 구별하지 않는다. 양쪽 모두 "니쥬나알?"이라고 한다(니는 '당신', 나알은 '어디'의 뜻). 이 흔하디흔한 한마디 속에 중국인의 인생철학이 응축되어 있다. 인생은 여행이다. 모든 인간은 여행자다. 우연히 어떤 땅으로 이동하여 '住(주)'한 결과, 며칠 또는 몇 개월 머무는 것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자자손손 수백 년을 정주하게 될 것인가. 그런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중국 사회에서는 이주와 유랑, 이민과 유민의 구별을 별로 하지 않았다.
--- '<머무르다>와 <살다>의 구별' 중에서
중국인은 사상이나 종교나 사고법에서도 대국적 합리주의를 좋아하고, 분석적 합리주의는 꺼린다. 근대 중국인이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마오쩌둥은 외국어를 하지 못했다. <자본론>의 원어인 독일어도 읽지 못했다. 경제학도 수학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본질의 대강을 추리는 능력이 탁월했다. 마오쩌둥은 중국어로 번역된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을 읽고, "이것은 중국의 역사로 말하면 이런 것이다"며 스스로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이는 데서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었다.
계급투쟁의 방법에 대해서도 마오쩌둥은 <서유기>의 손오공이라든가 <수호지>의 영웅호걸 등, 농민도 잘 알고 있는 캐릭터를 예로 들어 알기 쉽게 설명했다. 반면에, 해외 유학 경험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설픈 서양류의 분석적 합리주의를 배운 까닭에 대국적 합리주의라는 점에서 마오쩌둥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마오쩌둥이 해외 유학파를 누르고 중국공산당의 리더가 되었다.
--- '대국적 합리주의' 중에서
중국 문명은 어느 시대에나 인구와 식량, 자원이 빠듯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정치의 힘으로 사회 전체를 능란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이내 기근과 전쟁 등의 인재가 발생했다. 중국의 위정자는 방대한 인간을 먹여 살려야 했다. 인해전술로 황하의 홍수를 다스리고, 만리장성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인구가 만성적으로 과잉이었던 중국의 문명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문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서 중국만큼 정치 냄새가 나는 문명은 없다.
석가와 그리스도는 정치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공자와 노자와 맹자는 정치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불교와 기독교의 성인은 종교가지만, 유교와 도가 사상의 성인은 이상적인 정치가를 의미한다. 불교와 기독교는 개인을 내면으로부터 구제하려고 한다. 유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의 힘으로 사회를 구제하려고 한다. 결국, 중국 문명을 지배한 것은 후자의 사상이었다.
--- '정치적 문명' 중에서
중국에서는 자주 '역성혁명'이 일어났다. 전국 통일에 성공한 왕조에 대해 각 초대 황제의 출신을 살펴보면, 왕조의 시조 중에 서민과 이민족 출신이 많은 것에 놀라게 된다. 한족의 상류계급이 연 통일 왕조는 단 두 개밖에 없다. 기원전 3세기의 진(秦)과 3세기의 서진(西晉)이다.
예로부터 한족은 '중화사상'을 갖고 있었다. 주변의 이민족을 문화가 뒤처진 '이적'이라 하여 내려다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도 한족은 이적 출신 황제의 통치를 여러 차례 받아들였다. 왕조 교체기의 난세에서 최후의 결과를 가름하는 것은 실력이다. '천하의 사람들에게 밥을 먹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다. 그런 능력을 가진 영웅이라면 비록 이적의 핏줄이라 하더라도 민중은 황제로 받아들였다. 중국 사회에서 황제의 권위 근거는 태고의 '신화'가 아니었다. '천명', 즉 민중의 총의에 의거하고 있었다.
--- '초대 황제의 출신' 중에서
중국 사회는 낙엽이 수면에 떠 있는 연못과 비슷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면 연못 표면의 낙엽은 죄다 휩쓸려가 버리고, 또 다른 나뭇잎으로 빽빽이 덮인다. 그러나 연못 속의 물은 변함이 없다. 중국의 왕조 교체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와 그 일족은 사회의 최상층에 낙엽처럼 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근대 서양의 '혁명'은 연못 물, 즉 사회 전체의 변혁을 의미했다. 그러나 옛 중국의 '역성혁명'은 황실 성(姓)의 변혁만을, 즉 표면에 뜬 낙엽의 교체만을 의미했다. 중국에서는 왕조가 멸망해도 중간 지배층인 사대부층은 불멸이었다. 그 한 예가 풍도馮道)라는 인물이다.
--- '문명을 한 계급이 독점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