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은 단순한 성적 상징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이힐이 여성의 아름다운 외모와 성적 매력에 에로틱한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는 것을 살펴보자. 하이힐은 발목과 다리를 더 날씬해 보이도록 해서 섹시한 각선미를 연출한다. 발을 더 작아 보이게 만들고, 아치와 발등은 더욱 여성스러운 곡선미를 갖도록 만든다. 체형의 변화를 유도하여 하체의 형태와 움직임, 골반, 엉덩이, 복부, 가슴, 등의 곡선, 몸가짐 등을 모두 관능적으로 보이게 한다. 좁은 보폭의 종종걸음을 유도하여 걸음걸이를 여성화시킴으로써 무기력한 예속의 상태를 연상시킨다. 이것은 기사도 정신 혹은 마초적인 성격을 가진 많은 남성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착용자의 키를 높여주며, 성적 매력을 높여주어 심리적·정서적 사기가 향상되게 한다.
선정적인 하이힐은 발에 매혹적인 효과를 가져다 준다. 윌레트 커닝턴C. Willet Cunnington의 『왜 여성은 옷을 입는가』Why Women Wear Clothes라는 저서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하이힐이 존재한다는 것은, 발이 보여지고 존경받는다는 증거다." 하이힐은 발바닥의 긴 아치를 10도 내지 15도 더 굴곡지게 하고 발등에 뚜렷한 윤곽을 제공한다. 3인치의 힐은 발을 2인치 정도 작아 보이게 하는데, 이것은 풀 사이즈로 6사이즈의 구두를 신은 것과 비슷한 시각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풀 사이즈는 1/3인치, 하프 사이즈는 1/6인치―p.239 그림 설명 참조).
누구라도 이것을 간단히 테스트해 볼 수 있다. 우선 양말만 신은 채로 서서 한쪽 발꿈치 뒤쪽에 평평한 자를 놓는다. 그런 다음 발끝으로 몸을 지탱하면서 뒤꿈치를 바닥에서 2인치 정도 들어 올린다. 이때 자는 그대로 둔다. 그러면 발뒤꿈치와 자 사이에 1~2인치 정도의 작아진 공간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교시 발과 발가락의 본능적인 반사작용에 대한 킨지의 보고서를 다시 인용해 보자. "발은 전체적으로 쭉 펴져서 장딴지와 일직선이 되는데, 이것은 훈련받은 발레 무용수가 아니면 평소의 에로틱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도저히 취할 수 없는 동작이다."
이 '섹슈얼한' 자세는 하이힐을 신은 발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이힐은 성교중, 특히 오르가슴에 도달하거나 사정을 하는 순간에 취하는 발의 반사자세를 본뜬 것이다. 여기서 아주 까다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하이힐을 신은 발이 취하는 섹시한 자세를 남녀 모두가 잠재의식 속에서 인식하거나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것일까? 이것이 하이힐의 섹스 어필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하이힐을 신으면 모든 자세에 영향을 받게 된다. 플루겔은 그의 책에 "하이힐은 서 있는 자세에 전반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준다. 하이힐을 신으면 배가 나오는 일은 절대 없다. … 하이힐을 신으면 똑바로 선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이것은 가슴을 튀어나오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썼다. 하이힐은 또한 엉덩이가 튀어나오게 해 뒷모습을 맵시있게 할 뿐 아니라, 두꺼운 다리는 좀 가늘어 보이게, 가는 다리는 훨씬 미끈해 보이게 한다.
수백만의 중국 남성들은 전족을 한 여인들의 버들가지 같은 하늘하늘한 걸음걸이가 피를 위쪽으로 흐르게 하여, 여인의 음부와 둔부에 보다 관능적인 감각을 준다고 믿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유럽과 미국의 많은 남성들은 하이힐이 여성의 걸음걸이를 보다 감각적으로 변화시키고, 또 여성 성기의 성 온도를 높여 여성의 성감을 증대시킨다고 믿는다. 이것은 물론 증명되거나 조사된 적은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으로도 남자들의 머릿속에는 마치 입증된 사실과도 같은 에로틱한 효과가 나타난다.
하이힐이 여성의 걸음걸이를 섹시하게 바꾼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엉덩이를 흔드는 마릴린 먼로의 유명한 걸음걸이는 평평한 굽의 신발을 신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섹시한 걸음걸이에 대한 인터뷰를 하면서 솔직하게 그 공을 하이힐에게 돌렸다. "누가 하이힐을 발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여성들이 그 사람에게 많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말장난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를 출세길로 높이 들어올려준 건 바로 하이힐이었어요."
여성의 성적 자각 및 성적 성숙과 하이힐을 신는 것과의 상관 관계는 아주 일찍부터 시작된다. 소꿉장난을 하면서 어른 역할을 하는 여자아이들은 여성다움을 나타내는 일차적 상징으로 엄마의 하이힐을 신으려 한다. 십대 초반의 소녀들은 하이힐을 신을 수 있는 십대 후반이 되기를 학수고대한다. 아주 어린 소녀들에게 있어서 하이힐은 성적 정체성의 시발점이다.
『현대 심리학』Psychology Today을 저술한 심리학자 리처드 그린Richard Green은 그 책 가운데 아이들의 성 정체성 탐구라는 글에서 어린 남자아이들의 여성적 행동에 관한 연구를 보고했다. 그 연구는 평균 7세의 남자아이 50명을 대상으로 이성화(異性化)를 바라는 경향과 습관을 조사한 것이었다. 이성화 경향을 판단할 수 있는 가장 흔한 표식은 여성의 옷을 입는 경우다. 그린은 이렇게 말했다. 여장을 하고 싶어하는 소년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물건이 하이힐과 즉석에서 만든 여성의류다. 그린은 이들 중 한 남자아이의 부모와 가졌던 전형적인 인터뷰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여성적 남아의 표준적인 행동 패턴을 보여준다. 다음은 그 인터뷰를 발췌한 것이다.
아버지:가장 눈에 띄는 행동은, 그애가 아직도 아내의 구두를 신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우리 애들은 아무도 하이힐을 신지 않았어요.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구요. 그애가 처음이었고, 그 모습을 봤을 때 전 너무 당황했죠.
의사:자녀분이 아버님의 신발도 신은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지금까지 제 신발을 신은 적은 없었습니다.
의사:자녀분이 이런 (도착적인) 행동을 처음 한 게 언제였습니까?
어머니:하이힐을 신었을 때부터였어요.
이런 소년들은 성장해서도 이성의 옷에 집착하거나 자꾸 이성의 옷차림을 하려는 경우가 많다(그렇다고 그들이 반드시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린아이가 남자아이든 혹은 여자아이든, 하이힐을 신는 것은 성적 정체성의 일차적 특징 중 하나라는 것이다. 남성들은 흔히 여성의 낮은 힐 혹은 평평한 힐을 남성적이라고 말한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도 새침한 여선생이나 음울한 직장 여성은 보통 낮은 힐이나 평평한 힐의 점잖은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몇 년 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의 후기에 실린 시는 이런 이미지를 잘 포착하고 있다.
낮고 점잖은 구두를 신은 여자는
잠자리도 식사도 그 정도라네.
평평한 힐을 신은 여자와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서 있거나 걸어가는 모습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격과 신체의 전반적인 인상이 아주 뚜렷하게 다르다. 야한 쇼의 여왕이나 스트리퍼는 하이힐만 빼놓고 모든 의상을 벗어 던진다. 오직 하이힐의 유무에 따라, 그저 무대 위에 서 있는 알몸이냐 관능적이고 섹시한 여인이냐의 여부가 판가름나는 것이다.
「애틀랜틱 먼쓰리」Atlantic Monthly의 저명한 편집자였던 에드워드 윅스Edward Weeks는 이런 감상을 표현한 적이 있다. 발레 슈즈는 완벽한 다리를 가진 사람에게는 아주 훌륭한 신발이지만, 그런 다리를 갖지 못한 사람이 신으면 하이힐을 신었을 때와는 아주 다르게 보인다. 나는 보스턴 사람들이 발레 슈즈를 신은 것을 보고서 그제서야 많은 사람들이 휜 다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 남자들이 정말로 좋아하는 구두는 높고 가느다란 힐에 매끈하고 뾰족한 코를 가진 구두다. 그것은 발을 꽉 죄어주어 보기 좋은 아치를 만들어 준다.
윅스의 논평은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남성들은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살필 때 늘 맨 밑에서부터, 즉 발과 신발에서부터
--- pp. 181 ~ 186
신데렐라 이야기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동화이다. 이 동화는 왜 이토록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을까? 그것은 이 동화의 원본이 아이들 이야기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성적인 암시와 상징으로 가득한 성인용 로맨스로 쓰여진 것이며, 자그마한 여성의 발에 그 주제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남녀가 그 뒤얽힌 성적 이미지에 매혹되고 마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판본은 5백 개가 넘는데, 이중 상당수는 그림 형제가 편집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속했던 것이다. 9세기 중국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것이 2세기 뒤부터 시행된 전족 관습의 형성에 일조를 했는지도 모른다. 가장 오래된 판본은 기원전 7세기 이집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얘기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로도피스라는 아주 아름다운 소녀가 나일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명한 이솝의 친구 노예였다. 물방울을 튀기며 목욕을 하던 그녀는 독수리 한 마리가 휙 하고 내려와 강둑에 벗어놓은 슬리퍼 한 짝을 낚아채 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독수리는 그 슬리퍼를 물고 5백 마일 떨어진 멤피스 시로 날아가 이집트 왕, 프삼티크 1세(B.C. 663~609)의 발 밑에 그 슬리퍼를 떨어뜨렸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길조라고 확신한 왕은 그 작고 우아한 신발의 주인에 대한 연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후대의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왕자가 그러했듯이, 프삼티크 1세는 결연히 그 여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여기저기 여행하면서 수백 명의 소녀에게 그 슬리퍼를 신겨보던 중, 그는 마침내 로도피스를 만나게 된다. 물론 그 신발은 딱 들어맞았고 그녀는 왕비가 되었다. 그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자의 제3 피라미드가 사막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가장 잘 알려진 판본은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가 1697년에 쓴 것이다. 페로의 최초 판본에는 분명한 성적 암시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런 암시는 오역에 의해서 사라졌고, 나머지는 삭제되어 오늘날의 어린이용 동화로 탈바꿈했다. 그 당시 원고는 모두 저자가 손으로 직접 썼기 때문에, 페로의 원본에서 털 슬리퍼(pantoufle en vair)로 쓰여 있던 것이 필사하거나 번역하는 과정에서 잘못 옮겨 적어 유리 슬리퍼(pantoufle en verre)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 전해 내려온 것이다.
페로는 털로 된, 혹은 털로 장식한 슬리퍼나 구두에 발을 끼워넣는 것이 오래된 에로티시즘과 연관이 있고, 그것이 남근-음문 상징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슬리퍼가 발에 완벽하게 잘 맞는다는 것은 완벽한 성적 결합과 이상적인 결혼을 상징한다. 왕자와 신데렐라의 낭만적 결합은 남근인 발과 여음인 털 구두의 결합에 의해 성적으로 상징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적 암시는 후대에도 존속되었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작은 발에 대한 이미지를 낭만적으로 만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성적 매력을 풍기는 이상적인 발을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감수하고 있는 발의 변형과 훼손의 정도를 잘 보여준다. 좀더 대중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계모는 왕자가 발견한 그 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신데렐라의 못생긴 두 언니 중 큰딸에게는 엄지발가락을 자르게 하고, 작은딸에게는 뒤꿈치를 자르게 한다. 19세기 초 야콥 루드비히 칼 그림Jakob Ludwig Karl Grimm이 쓴 판본에는 이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다음날 아침, 왕자는 부왕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이 황금 구두가 발에 딱 맞는 여성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두 언니는 기뻐했다. 그들은 예쁜 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언니가 그 구두를 가지고 자기 방에 들어가 신으려고 했고, 계모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두는 너무 작아서 엄지발가락이 걸려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칼을 가져다 주며 말했다. "발가락을 잘라버려. 네가 여왕이 되면 걸어다니는 일은 없을 테니까." 언니는 발가락을 잘라내고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구두에 발을 밀어 넣고 왕자에게 나아갔다. 왕자는 그녀를 자신의 신부로 삼겠다며 말에 태워 함께 떠났다.
그러나 그림의 이야기는 계속되는데, 언니의 구두와 스타킹에서 피가 흘러내려 거짓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왕자는 그녀를 어머니에게 돌려보냈고, 어머니는 그 뒤 둘째딸의 발꿈치를 잘라내고 왕자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또다시 피가 흘러 사기극이 들통난다. 바로 이때 정말로 그 작은 신발에 딱 맞는 발을 가진 신데렐라가 등장한다. 그림 동화의 후대 판본에서 발가락과 발꿈치를 잘라내는 장면은 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에 너무 끔찍하다는 이유로 삭제된다.
그러나 동화라고 해서 속아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순진하게만 보이는 신데렐라가 사실은 섹시한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왕자와 신데렐라 사이의 실제 대화 장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신데렐라의 발에 구두가 쏙 들어가는 것을 본 왕자는 감탄했다. "아, 정말 딱 맞는군요!"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그럼요,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빨간 색에, 사이즈도 더 작고, 더 높은 힐이 달린, 앞코가 뾰족한 구두는 없나요?" 사실상 신데렐라는 대부분의 여성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만약 구두가 딱 맞는다면 여성은 그게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더 작은 사이즈를 요구했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 역설적인 환상이다. 작고 빡빡한 구두는 성적 매력을 높여주어 그 감각성을 증대시켜 주기 때문에 실제로는 착용감이 좋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고통 속의 쾌락 원칙이라고 한다. 신데렐라는 '완벽하게 맞는 구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관심 있었던 건 오히려 '완벽해 보이는 구두'였다.
시간이 흘러도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여성들 역시 더 작은 구두에 발을 집어넣을 수 있다면 기꺼이 새끼발가락을 잘라낼 것이다. 또 너무 작은 구두에 발을 구겨 넣음으로써 발생하는 발의 변형이나 불편함 따위도 기꺼이 참아낼 것이다. 여성의 발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에로스의 상흔, 쾌락의 상처는 작아 보이는 발, 작아 보이는 신발의 성적인 파워를 증명한다. 어머니들이 어린 딸을 데리고 신발 가게에 갔을 때 초조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딸애의 발이 너무 빨리 자라고 있어요. 얘가 커서 도둑놈 발처럼 큰발을 갖게 되는 건 아닐까요? 그러나 기이하게도 남자아이를 데리고 왔을 경우엔 그런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다.
--- pp. 234 ~ 238
발은 본래 에로틱한 것이며 신발은 섹슈얼한 상징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로 중국의 전족(纏足)을 들 수 있다. 성의 역사상 전족처럼 발에 성신경이 있다는 사실과, 발과 신발의 성적 역할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자료도 없을 것이다. 근 1천 년 동안, 약 50억의 중국인들이 여성의 발을 사용한 성적 환락에 빠져 왔다. 그저 그 발에 매혹되거나 로맨스를 느끼는 정도를 넘어서서, 정부 고관에서 농부에 이르기까지 수십억의 중국인들이 성적 엑스터시에 빠져 무절제한 환락에 탐닉했던 것이다.
오늘날은 물론이고,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중국의 전족 관습에 대하여 순진한 견해 혹은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외부 사람들은 전족―중국에서는 애정을 담아 추앙하는 말로 금련(金蓮) 혹은 향련(香蓮)이라고 부름―을 미개하고 야만적인 습속으로 치부하며, 고대 중국의 어떤 황비(皇妃)의 변덕에 의해 처음 시행되어 1천 년을 존속해온 잔인하고 경박한 전통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진실은 아주 다르다. 중국인들은 여체 중 전족을 한 발을 가장 에로틱하고 소중한 부위로 생각했으며, 게다가 여성 자신의 인품까지도 금련에 반영되어 있다고 여겼다. 전족을 한 수천만 명의 중국 여성들은 사회적 의미에서도 성적인 의미에서도 상류 계급에 속했으며, 보통의 여성, 즉 전족을 하지 않은 여성에게는 없는 관능적인 힘을 갖춘, 군림하는 씨족의 여신과도 같았던 것이다. 중국의 거의 모든 남성들에게 금련을 애무하는 전희가 없는 성행위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여체의 다른 부위들은 금련에 비해 성감대로서의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전족은 성적 환희를 주는 여체 기관으로서 질(膣)과 쌍벽을 이루었다. 임어당(林語堂)은 "전족의 관습이 성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며, 방탕한 황제의 궁중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
지난 1천 년 동안, 중국 문학의 중심 테마는 금련이었다. 중국 남성이 환락의 몽상에 빠졌다면, 에로틱한 금련은 그 꿈의 핵심이었다. 금련을 엿보지 않는 한 관음적 행위는 의미가 없었다. 그림·조각·시가·문학·노래 등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중국을 사로잡았던 에로티시즘의 대부분은 금련과 금련이 불러일으키는 쾌락적·성적 이미지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국의 전족을 단순히 기괴하고 야만적인 습속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중국의 성적 현실을 전혀 모르는 무식의 소치다. 중국에서 전족은 엄청난 힘으로 퍼져나갔으며, 금련이 지닌 최음(催淫)의 힘은 중국 문화권 전체를 흥분시켰다. 이것이 과거 중국의 성적 현실이었다. 이쯤 되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당연히 떠오를 것이다.
왜 중국인들은 금련을 이처럼 열정적으로 좋아하게 되었을까? 손이나 팔, 유방, 목, 어깨, 머리카락 등을 다 제쳐놓고 하필이면 왜 발인가? 이런 별난 풍습이 1천 년이나 지속된 원동력은 어디에 기인한 걸까? 만약 이 풍습이 하나의 페티시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일개 페티시가 근 1천 년 동안이나 50억 중국인(다른 나라 사람들도 포함됨)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도대체 전족의 어떤 점이 그토록 에로틱하길래 귀족, 지식인, 승려, 상인, 학자, 과학자, 예술가, 농부, 군인 등 모든 계층의 남성들을 성적 흥분으로 인한 광란의 상태로까지 몰고 갔는가?
중국의 전족이 미친 짓, 무의미한 학대였다고 말하기는 아주 쉽다. 그러나 우리가 뒤의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신체 기형이나 발의 사드-마조히즘은 유독 중국인들에게만 보여지는 예외적 특징이 아니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도 이런 현상이 존재했다. 인류는 자연적인 형태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을 좋아했다. 바꾸어 말하면 현실보다는 환상을 더 좋아했던 것이다. 특히 그런 환상이 에로틱한 매력까지 갖고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발과 그 공범자인 신발은 성적 매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신체의 변형도 마다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단지 이런 생각을 극단으로까지 밀고 간 것뿐이다.
11세기 초에 전족 풍습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중국인들은 자그마한 여성의 발을 찬미했다. 이런 찬미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널리 발견된다. 조그맣고 예쁜 발은 얼굴이 못생긴 여자의 4분의 3을 보상해 준다라는 속담도 있다. 조그맣고 예쁜 발은 2천 5백 년 전인 공자 시대의 시인들에게도 우아하고 문화적인 혈통이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지성의 상징으로 생각되었다. 중국인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민족으로서 에로틱한 감수성에 민감했기 때문에 전족술을 생각해내 여성의 발에―실제적으로는 여성의 신체 전체에―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강렬한 관능적 이미지를 부여했고, 그리하여 여성의 작은 발에 새로운 차원을 더해 주었다.
--- pp. 48 ~ 72
그러나 감각적인 남성 구두는 때때로 극단으로 달려 노골적으로 섹시해지거나 음란해지기까지 했다. 약 8백 년 전, 풀렌(poulaine)이라는 특이한 스타일의 부드러운 감각 구두가 등장했다. 그러나 그 후 3백 년 남짓한 시간 동안 그것은 이제껏 착용되었던 신발들 중 가장 야하고 외설적인 구두 스타일로 변해갔다.
풀렌은 지역에 따라 크라코(cracowe) 혹은 폰텐(pontaine)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구두는 리리파이프(liripipe;길게 늘어진 천의 끝부분) 혹은 리어업(learup;가죽의 끝부분)이라 불리는 엄청나게 긴 앞코를 가지고 있었다. 이 앞코는 처음에는 위로 약 2인치 정도가 들어올려져 있었는데, 이는 누가 봐도 남근의 상징임이 분명했다. 상상력이 넘치는 남자들은 재빨리 남근 디자인을 더욱 확대, 발전시켰다. 곧 앞코 부분은 점점 더 길어져서 마침내 앞코를 빳빳하게 세우기 위해 이끼, 양털 등의 보충물(補充物)을 집어넣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풀렌의 목적은 발기한 페니스를 흉내내는 데 있었다. 빳빳하게 풀먹인 앞코는 2인치에서 4인치, 그리고 다시 8인치, 마지막에는 14인치(혹은 그 이상)까지 늘어나 그 길다란 앞코가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느다란 끈으로 앞코 끝을 발목 근처에다 묶어놓기도 했다. 이 의사(擬似) 남근은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살아있는 것처럼 흔들렸다. 아주 대담한 사람은 이 긴 앞코 부분이 발기한 페니스의 실제 모습을 닮도록 디자인과 색상에 신경을 쓰기도 했다. 때로는 풀렌을 남의 눈에 더욱 잘 띄게 하기 위해 신발코 끝에 작은 방울을 달아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나게 하기도 했다. 이것은 어리석은 종(folly bells)이라고 불렸는데, 그 신발을 신은 사람이 약간의 성희롱을 받아줄 용의가 있음을 알리는 표시였다. 이와 똑같은 방울이 나중에 코드피스(codpiece;코드피스는 16세기에 유행한 남성용 반바지의 앞쪽 사타구니 부분에 불룩하게 달았던 주머니―옮긴이)에도 부착되었다.
풀렌은 11세기에 앙주(Anjou)의 펄크 레친Fulk Rechin이라는 프랑스 귀족이 유럽에 소개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발톱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이런 코끝이 긴 구두를 고안했다고 하나,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태연스럽게도 그는 이 구두를 성적인 자극을 주기 위한 패션이라고 소개했다(그는 당시의 유명한 멋쟁이인 동시에 유명한 난봉꾼이었다). 뿔같이 생긴 이 구두는 처음에는 궁중에서 웃음거리가 되었고, 펄크에게 코르나두스(Cornadus;뿔달린 사람)라는 별명을 안겨 주었다. 이 단어는 현대 이탈리아어에서는 바람난 아내를 둔 남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풀렌이라는 에로틱한 예술작품은 점점 더 커지고 품질도 좋아졌다. 흥미를 느끼는 여성들의 반응에 용기를 얻은 남성들이 에로틱한 창조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풀렌은 궁중이나 부유한 가정의 만찬 때 남녀가 테이블 밑에서 나누는 성적 유희의 도구가 되었다. 남성은 빳빳하게 선 풀렌으로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여성의 스커트 자락을 들어올렸고, 여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더 위쪽으로 올릴 수도 있었다. 이 신발에 부착된 딜도(dildo;인공성기) 덕분에, 수프에서 시작해 디저트가 나오기까지 한 번 혹은 그 이상의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성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부 여성들은 풀렌을 이용하여 자위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그 풀렌이 사랑하는 남성의 것인 경우 성적 이미지의 효과는 더욱 환상적인 쾌락을 가져다 주었다. 여성이 발기부전인 남편이나 애인에게 다음과 같은 냉소적인 말을 내뱉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신의 풀렌이 당신보다 낫군요." 교회는 풀렌의 노골적인 음란함에 충격을 받았다. 성직자들은 처음에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방해가 된다면서 풀렌을 착용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종교계의 비난은 유럽 전역에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격해져 갔으며, 마침내 풀렌은 사탄의 저주라고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중세 시대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4분의 1이 죽어갈 때, 수많은 성직자들은 음란한 풀렌을 불쾌하게 여긴 하느님이 이런 질병을 보냈다며 풀렌을 책망했다.
이제 사태는 교회와 국가의 수뇌부까지도 풀렌을 매도하고 나설 정도로 심각해졌다. 1215년 프랑스의 퀴르송Curson 추기경은 파리 대학의 교수들에게 풀렌을 착용하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렸다. 14세기에 교황 우르바노 5세는 풀렌을 신는 것은 "미풍양속을 파괴하고, 신과 교회를 조롱하는 처사이며, 세속적 허영의 극치인 동시에 광적인 교만의 표현"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풀렌이 평민들에게까지 퍼져나가게 되자, 이와 동시에 음란한 유희들도 순식간에 서민들 사이로 번져갔다. 1367년 프랑스 왕 샤를 4세는 몽펠리에에서 앞으로 평민은 풀렌을 신어서는 안 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이제껏 인기를 누려온 광적인 교만은 간단하게 지하로 숨어들어 개인적인 파티, 저녁식사, 무도회, 기타 사교 행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교회와 국가도 만만치 않았다. 정부는 풀렌의 길이를 평민의 경우 6인치까지로, 귀족은 24인치까지로 제한했고, 왕족은 무제한으로 허용했다. 1463년 영국의 에드워드 4세는 구두코 길이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2인치로 제한하는 엄격한 법령을 반포했다. 이렇게 하여 광적인 교만은 드디어 현실의 거센 비난을 수용했고 그 결과 작은 크기로 위축되었다.
300년에 걸친 풀렌의 지배는 15세기 후반에 와서야 마침내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남근 환상의 오랜 인기는 너무나 그 영향력이 커서, 16세기에 또 다른 남근 환상인 코드피스(codpiece)의 출현을 가져왔다. 플루겔은 튜더 왕조 시대에 악명 높았던 코드피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코드피스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페니스를 흉내내 빳빳한 물건으로 장식되었다. 이 코드피스는 전(前)시대에서 아이디어를 물려받은 것이다. 당시의 남근 상징은 성기 근처가 아니라 신체의 멀리 떨어진 부분, 즉 발에 위치해 있었다. 중세에는 풀렌이라는 앞코가 긴 남근 형태의 신발을 신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것은 엄청난 분노와 반항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다." 이렇게 볼 때 우두머리(cock of the walk)라는 표현은 수탉보다는 풀렌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풀렌이 남근을 강조하는 구두 패션에서 아주 새로운 아이디어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풀렌의 과장되게 긴 구두코 디자인은 3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고대 이집트, 고대 중국, 터키, 페르시아, 몽골, 기타 등지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풀렌이 착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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