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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3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568쪽 | 510g | 130*190*27mm
ISBN13 9791104906909
ISBN10 1104906902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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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안개가 온 땅을 희부옇게 뒤덮을 적이 면, 그 나무는 마치 공중에 두둥실 뜬 숲처럼 보이곤 했다. 끝이 하늘에 닿도록 키가 큰 나무였다. 그 나무가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신령스러운 나무는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였으며, 성도(聖都)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였다. 나무 의 거대한 둥치에는 북과 놋방울이 따기 좋은 과실 모양으로 매 달려 있었다.
누구든 그 북과 방울을 울리는 자는 하늘의 노비가 되었다.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었다. 그가 도둑질을 했거나 간음을 했거 나 혹은 살인을 했을지라도, 북과 방울을 울린 순간부터 그의 목숨은 오롯이 하늘의 것이었다.
하늘의 노비가 되어 이곳 성도에 발을 들인 자들은 두 번 다시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닌, 하늘의 소유물이다. 그러므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 함부로 몸을 더럽혀서도 아니 된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우리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어머니는 본디 귀한 사람이었다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어머니는 뱃속에 우리를 품은 채로 이곳에 와서, 뱃속에 우리를 품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이 성도를 다스리는 천군(天君)이 손수 어머니의 배를 갈라 우리를 꺼내주었다. 우리는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라났다.
나는 열 살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단은 영특했기에 일찌감치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이 내게 그 비밀을 알려줬던 날, 저녁 하늘의 노을빛이 유달리 붉어 보였던 게 기억난다.
그날 나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내가 발을 쿵쿵 구르며 집에 돌아왔을 때, 단은 마당 한편에서 나뭇가지를 목검 삼아 제법 진지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어렸던 나는 그를 보자마자 철없이 투덜거렸더랬다.
「옥 할머니 있잖아, 되게 못됐다. 글쎄, 나더러 방울이를 찌르라지 뭐야.」
그날은 내가 살아 움직이는 것에 문신을 새긴 첫날이었다.
방울이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다리를 저는 송아지였다. 그런 송아지는 부정하여 천제(天祭)에 생뢰로 쓰이지 못하며, 이다음에 새끼를 볼 일도 없다. 그래도 그 나름의 쓸모는 있었다. 옥 할머니는 방울이의 옆구리 털을 박박 밀어 놓고 내게 문신을 시켰다.
「내가 찌를 때마다 방울이가 막 울었어. 진짜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니까. 그런데도 옥 할머니는 나한테 제대로 안 한다고 화만 내는 거 있지. 난 방울이를 아프게 하기 싫었단 말이야.」
그 말을 들은 단이 나를 어린애 취급하리라는 건, 말을 하면서부터도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나는 불평할 상대를 잘못 고른 참이었다. 단은 예전에 나보다 더 끔찍한 경험을 하고 돌아와서도 ‘소의 목을 따고 머릿속을 파내서 씻었을 뿐이야’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굴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양 심드렁하게 목검만 휘둘렀다. 가뜩이나 우울했던 내 기분은 점점 더 엉망이 되었다. 나는 급기야 바늘통을 내팽개쳐 버렸다.
「이제 이런 거 안 해! 허구한 날 똑같은 무늬만 새기는 것도 지겨워 죽겠어. 옥 할머니는 나한테 새로운 무늬를 가르쳐 줄 마음이 없는 거야. 나더러 평생 똑같은 무늬만 새기고 또 새기고, 그러다가 심심하면 방울이나 괴롭히라는 거지. 난 그러기 싫어! 절대로 안 해! 아버지한테 말씀 드려서 당장 그만둬야지.」
그제야 단이 목검을 내려놓곤 나지막이 으름장을 놓았다.
「아니, 넌 그런 말 못 해. 내가 가만히 안 둘 테니까.」
「때릴 테면 때려봐. 아버지한테 이른다.」
그는 흙바닥에 떨어진 바늘통을 주웠다. 소맷자락으로 흙먼지를 닦아 내게 건네면서, 그는 한숨처럼 말했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이 그토록 심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무슨 말이든 쏘아붙였을 터였다.
나는 일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단은 그대로 내 곁에 앉아, 내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그건 비밀이었다. 모두들 알면서도 우리에게만 쉬쉬하는 비밀이었다. 내게 문신을 가르쳐 준 옥 할머니가 끝끝내 알려주지 않은 그 무늬의 비밀을, 나는 그날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 번도 넘어가 본 적이 없는 성도 한복판의 금줄 너머에, 어떤 자들이 살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아버지라 여겨왔던 사람이 우리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어머니는 금줄 너머에 있던 하늘의 노비였다. 우리도 원래는 그곳에 있어야 마땅했다. 다만 천군께서 우리를 거두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품에 안겨 금줄을 넘어온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곳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반쪽짜리, 금줄에 걸쳐 있는 애매한 존재였다. 사람으로서의 특출한 쓸모가 없으면 사람으로 인정받지도 못할 존재였다. 우리는 어른이 되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그 쓸모를 입증해 보여야만 했다.
세 살 때부터 신동이라 불리던 단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그는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절대로 잊지 않았으며, 모든 면에 있어서 다재다능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였다. 내게 특별한 재주가 있다면 오로지 그 무늬를 새기는 것뿐이었고, 그나마도 지루한 연습의 결과였다.
단은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곤,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속삭였다.
「그 무늬는 하늘의 문양이야. 너는 곧 사람의 이마에 그 문신을 새기게 될 거야. 싫어도 하게 되겠지. 너와 나의 이마에 그런 문신이 생기는 것보다는, 남한테 새기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노비의 이마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주인의 표식을 새긴다. 내가 유일하게 잘할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잘해야만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사람의 이마에 문신을 새겼다. 나보다도 더 작은 어린아이였다. 부모를 따라 성도에 흘러든 그 아이는, 내가 새긴 문신으로 인해 영영 하늘의 노비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신으로 인해 사람임을 인정받았다.
그날 나는 몹시 울었고, 단은 조용히 손을 잡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우리는 둘이면서도 하나였다. 내가 사람이 아니라면, 단 역시 사람일 수 없었다. 손끝으로 느낀 그 사실이 조금은 기뻤더랬다. 그 작은 기쁨에 취하여, 나는 그 어린아이와 나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잊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그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연아, 일어나. 연아!」
동도 안 튼 새벽부터 단이 소리 죽여 나를 깨웠다. 여태 사방이 컴컴한데, 그는 등불조차 켜지 않고 내 손에 옷가지를 쥐어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옷을 받으면서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한밤중에 무슨 일…….」
그는 대뜸 내 입을 틀어막고 빠르게 속삭였다.
「나는 네 이마에 문신이 생기는 꼴은 못 봐. 그러니 떠난다. 서둘러.」
잠이 확 달아났다. 그 비밀을 알게 된 날부터 줄곧 내 마음 한구석에 꺼림칙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공포가 한순간에 깨어나 나를 휘어잡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걸쳐 입었다. 그사이 단은 어둠 속에서 덜그럭거리며 내 문갑을 뒤적이고 있었다. 몇 가지 안 되는 내 패물들을 챙기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에는 거의 쓰지도 않고 문갑 속에 아껴두기만 했던 물건들이지만, 성도 밖으로 나가면 그런 값진 것들이 필요하게 될지 모른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는 정녕 이곳을 떠난다.
방을 나가기 직전, 나는 주저하며 단에게 속삭여 물었다.
「아버지께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럴 여유가 없어. 곧 교대 시각이다.」
단은 나를 끌고 잰걸음으로 아버지의 방 앞을 지나쳤다.
그는 성도를 호위하는 병사다. 간밤에는 그가 성도 입구에서 번을 서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성도 앞은 따로 지키는 병사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무사히 성도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도 성도 어귀의 큰 나무 밑을 지나칠 적에, 나는 괜스레 마음을 졸였다. 그 나무 둥치에 매달린 북과 놋방울이 스스로 울려, 노비들의 도주를 하늘에 고하지는 않을까 하고.
성도 앞에는 길이 세 갈래로 나 있었다. 그 길을 보자 그저 막막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성도 밖에서 사는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성도로 도망친다지만, 성도 안에서만 살던 우리에게는 달리 도망칠 곳도 없었다.
단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무턱대고 오른쪽 길로 향했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가는 길에, 그는 줄곧 길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고 있었다. 우리가 가는 길의 모습을 그대로 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잊는 방법을 모를 뿐더러 아무도 그에게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기에, 잊어버리고 싶어도 못 잊는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성도로 돌아갈 수 있다. 그 사실이 내겐 적잖은 위안이 되었다. 집을 떠나 도망치는 주제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안도하다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노릇인지.
동이 붉게 터올 무렵, 우리는 길을 벗어나 근처의 산으로 들어갔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벌써 날이 밝아 완연한 아침이었다.
단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따라 멈추어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에 내 새끼손톱만 한 나무가 보였다. 그 곁으로 깨알같이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곳이 성도였다. 우리가 태어나 열여섯 해를 살아온 우리의 고향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았다. 고작해야 내 손바닥 크기였다. 저 비좁은 곳에서 장장 열여섯 해씩이나 살았으면서도, 그동안 갑갑함을 느낀 적이 없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때 단이 발길을 돌려 산 옆구리로 향했다. 벌거벗은 나무들이 초라한 몰골로 낙엽을 밟고 서 있는 이 계절에도, 산 옆구리의 솔숲은 여태 무성한 초록빛이었다.
우리는 솔숲 맨 위의 소나무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해가 질 때까지 여기에 있자. 네 옷이 눈에 띄어 위험하겠다.」
내 옷은 새하얀 명주옷이었다. 성도 사람들은 대개 흰 옷을 입는다. 검은 옷을 입는 사람은 단과 같은 성도의 병사들뿐이다.
우리는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나는 그새 지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우리가 왜 갑자기 집을 떠나 도망쳐야만 하는지, 생각할수록 혼란스럽고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예 운을 떼었다.
「어제 아버지의 안색이 영 어두워서,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긴 했어. 설마하니 이런 일일 줄은……. 언제부터 정해져 있었던 거야? 넌 이미 알고 있었지」
「나도 아까 전에야 알았어. 설마 아버지가…….」
단은 잠시 말을 끊고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그를 다그치려 할 때, 그가 도로 입을 열었다.
「간밤에 내가 보초를 설 차례가 아니었는데, 아버지가 일부러 내 번을 바꿔놓으셨다.」
「우리, 도망치라고」
「아버지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나 보지. 오늘 천군이 바뀔 예정이거든.」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제껏 천군이 바뀔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안이하게도 우리 아버지가 평생 천군일 거라고만 생각해 왔다.
「원래 그렇게 바뀌기도 하는 거였니? 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안 바뀌는 줄로만 알았어. 그럼 우리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아버지는 아마도 편히 쉬시겠지.」
단이 한숨처럼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가 지면 이 산을 넘자. 그 전에 먼저 가서 살펴보고 올게.」
나는 다급히 그의 손을 붙들며 따라 일어섰다.
「같이 가.」
「연아, 네 옷.」
그러고 보니 내 옷이 눈에 띄어서 위험하다고 솔숲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나는 금세 풀죽어 어깨를 떨어뜨렸다. 단은 끝내 혼자 갈 요량으로 내게 말했다.
「해 지기 전엔 돌아올 테니까, 걱정 말고 여기서 기다려.」
「꼭 가야 해? 그냥 같이 있자. 혹시 네가 길을 잃어서 못 돌아오면 나 혼자서 어쩌라고.」
「내가 너냐? 길을 잃게.」
하긴 단이라면 길을 잃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괜스레 불안하여 좀처럼 그의 손을 놓지 못했다.
단은 난감한 기색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마치 우는 어린애한테 곶감이라도 주듯이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집을 떠나기 전 내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단이 어둠 속에서 닥치는 대로 챙긴 패물 주머니였다.
「네가 어디 있는지는 눈 감고도 찾을 수 있다. 금방 돌아올게. 절대 이 솔숲을 벗어나면 안 돼. 알았지」
「응.」
그제야 나는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그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도 눈길로나마 그를 좇았으나, 단은 원체 민첩하여 금세 내 시야로부터 벗어났다.
홀로 남겨진 나는 다시금 소나무 아래에 오도카니 주저앉았다. 단이 주고 간 주머니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그 속에 든 것들을 치마폭에 쏟아놓았다.
두 줄짜리 새파란 구슬 목걸이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열세 살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그해에 비로소 사람이 된 내게 ‘이다음에 혼인할 때 쓸 만하겠지’라며 주신 선물이었다. 나는 정녕 혼인할 때까지 그것을 아껴둘 작정으로, 그동안 문갑 속 깊숙이 모셔두고만 있었더랬다. 단이 어찌 알고 용케도 찾아내어 챙겼는지 모른다. 그 외에도 단이 챙겨 넣은 물건들은 하나같이 내가 소중히 여기던 보물들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부질없이 추억을 곱씹다가, 살그머니 대모 빗을 집어 들었다. 새벽에 도망치느라 바빠서 미처 머리를 빗을 겨를도 없었다. 한 번쯤 머리를 빗는다고 해서 빗이 금방 닳아 없어지지는 않을 터였다. 내 빗으로 내 머리를 빗으면서도, 나는 마치 남의 빗을 빌려 쓰는 사람처럼 궁색한 변명을 떠올렸다.
이 빗으로 쌀 몇 줌을 얻을 수 있을까. 이 가락지로 며칠이나 연명할 수 있을까. 한데 뭉쳐 팔면 집 한 칸은 마련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우리에겐 이제 아무것도 없다.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다. 아는 사람도 없다. 그런 것들은 전부 성도에 놔두고 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우리 의 고향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얼마 안 가 이 보물들도 어디론가 없어져 버릴 터였다. 이것들을 보며 꿈꾸었던 나의 소박하고 행복한 미래도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다.
하도 오래 빗질을 했더니 머릿속이 다 따가웠다. 나는 대모빗을 잘 닦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다른 물건들도 하나씩 천천히 집어넣다가, 마지막으로 두 줄짜리 새파란 목걸이를 꽉 움켜쥔 채 한동안 망설였다.
「미안하지만 이것만은 남겨줘.」
나는 나직하게 속삭이며 재빨리 목걸이를 걸쳤다. 그것마저 팔고 나면, 내게는 정녕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만 같았다.
주머니 입구를 단단히 졸라맨 다음, 나는 우울해져서 하릴없이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왜 내가 가진 것을 모두 잃고, 열여섯 해씩이나 살던 고향에서 쫓기듯 도망쳐야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본 적도 없는 어머니가 미워졌다. 만일 어머니가 죄를 짓고 성도로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떳떳하게 죗값을 치렀다면…….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태어나 보지도 못한 채 어머니의 뱃속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원망하려야 원망할 수도 없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우리가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다. 단지 의붓아버지를 잘 만나서, 그동안 분에 넘치는 복록을 누리며 살았을 따름이다. 그래놓고도 우리는 끝내 어머니를 닮아, 잘못 태어난 죗값을 피하고자 어디론가 도망치는 중이다.
나는 맥없이 나무에 머리를 기댔다. 삐죽삐죽한 솔잎 사이로 하늘이 여전히 말간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불현듯 이마 한복판이 못 견디게 따끔거렸다. 내가 내 것이라 생각해 왔던 모든 것들은, 어쩌면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차마 그 하늘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고는 아마도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듯도 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하늘의 현신을 보았다.
온몸이 은빛으로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사내의 형상이었다. 그 은빛 옷은 희한하고 교묘하여, 도무지 이 세상에 속한 물건 같지 않았다.
그는 훤칠한 키로 나를 고요히 굽어보고 있었다. 살갗은 솜구름처럼 보얗고, 이목구비는 흠 잡을 데 없이 반듯한 귀인이었다. 그의 길고 깊은 눈에는 만물을 긍휼히 여기는 연민과 필연적인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 눈에 눈을 맞춘 순간, 나는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혀 얼어붙었다.
단이 아니라면, 아무도 나를 찾아올 이가 없을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내가 이 솔숲에 꼭꼭 숨어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가 알겠는가. 오직 하늘만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로지 저 하늘만이.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의 말로 무어라 나지막이 속삭였을 때, 나는 확신했다.
그는 하늘의 현신이다. 나를 잡으러 온 게 틀림없다.
나는 전전긍긍 주저하며 가까스로 잠긴 목소리를 긁어냈다.
「여기엔 저밖에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저 혼자뿐이었어요. 그러니까 저만…….」
무슨 용기가 나서 그에게 거짓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훤히 알고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내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듯 쉿 소리를 냈다. 이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무어라 나를 타이르며, 내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무늬는 하늘의 문양이야. 너는 곧 사람의 이마에 그 문신을 새기게 될 거야.」

하늘이다. 하늘이 자신의 것을 찾으러 왔다. 도망친 노비에게 끝끝내 주인의 표식을 새기려나 보다.
겁에 질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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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설화 같은 연과 하녹의 이야기

원양국의 왕 해루는 자신의 개인적 원한을 갚기 위해 신성한 장소인 성도를 없애 줄 것을 섭제국에 은밀히 요청한다. 섭제국의 왕 하녹은 원양국의 병권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흔쾌히 그 제안에 응한다.
한편 성도에서 살던 쌍둥이 남매 연과 단은 의붓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어 성도로부터 도망친다. 성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인근 솔숲에 숨어 있던 중, 단은 잠시 주위를 살피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홀로 남겨진 연은 솔숲에서 깜빡 잠이 든다.
눈을 뜬 연의 앞에 나타난 것은 성도를 멸하러 온 섭제국의 왕 하녹. 연은 영문도 모른 채 생포되어 섭제국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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