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국과의 전쟁을 법적으로 종결하고 전쟁으로 인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공식적인 화해’가 실현된 것은 1951년 9월 8일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다. 일본과 연합국 48개국이 서명한 이 강화조약은 이듬해인 1952년 4월 28일 발효되었다.
그러나 이 강화조약에 모든 연합국이 조인하고 비준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 소련, 그리고 여러 아시아 국가와의 강화는 뒤로 미뤄졌다. 아시아에서의 냉전 때문에 당시 서방국들과만 ‘다수강화’(단독강화)를 체결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선택은 강화조약과 동시에 체결된 미일안전보장조약도 강화체제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의 안전과 국제사회로의 복귀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국제질서 안정까지 고려한 체제이다.
이것이 ‘강화체제’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특징은 포츠담선언 수락으로부터 6년 반에 걸친 점령개혁을 ‘사실상의 강화’라고 했듯이, 강화체제는 국내개혁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강화조약의 기본적인 원칙은 항복조건이었던 포츠담선언에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 선언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점령개혁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이야말로 곧 강화와 직결된다고 여겼다. 외무성이 1946년 중반 쯤 ‘평화조약은 새로운 상황의 전개에 따라, 기정사실을 법적으로 확인하고 이를 항구화시키는 수단’이라고 간파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외교기록 ① ‘평화조약 문제 간사회의 제1차 연구보고’, 1946년 5월)
이 책에서 말하는 ‘평화체제’라는 개념은 안보조약과 함께 강화조약이나 여러 아시아 국가와 맺은 일련의 평화조약 또는 배상협정을 포함하지만 단지 국가 간의 법적 형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군사화’와 ‘민주화’라는 두 개의 기본 목표인 국내개혁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체제이며, 이는 전후처리의 기반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강화체제와 국내개혁의 주축이었던 ‘신헌법체제’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모순된 관계에 있게 된다. 왜냐하면 ‘전쟁포기’와 ‘비무장’을 국가이념으로 설정한 신헌법체제는 냉전이 확립되기 전인 1946년에 형성되었고, ‘억제된 무장’을 전제로 하는 강화체제는 냉전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을 이른바 정합적으로 해결한 장본인은 요시다 총리였다. 요시다 총리는 비무장이 반드시 ‘영세중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진영의 일원이 되는 것과 비무장의 선택이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신헌법체제와 강화체제가 상호보완적이라는 식으로 해결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강화체제는 신헌법체제에서 정의하고 있는 전후국가를 냉전이라는 국제적 맥락 속에서 재정의한 것이다.(五百旗頭?, ??日本の近代 6??)
강화체제의 세 번째 특징은, ‘식민지제국’의 청산 작업까지 포함한다는 점이다. 강화조약에 따라 성립된 ‘공식적인 화해’는 서명국이 일본과 전쟁상태에 있었던 국가들로 한정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 후의 처리에 관한 것이지, 식민지 지배의 처리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수행과 식민지통치란 원래 차원이 다른 국가의 행위이다. 그러나 1945년 패전은 연합국에 대한 패배이자 동시에 식민지나 점령지 포기를 수반하는 ‘제국의 해체’를 의미했다. 따라서 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쌍방은 식민지제국 관계를 청산한다고 명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역사 문제’를 야기시키는 원천이 되기도 했다.
이상과 같이, 1부에서는 전후처리의 기반이 된 강화체제를 점령개혁이나 식민지제국의 청산까지 포함한 넓은 개념으로 파악하되, 강화와 독립 후에 남겨진 수많은 ‘역사 문제’의 원천이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예를 들면, 도쿄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은 점령개혁(비군사화정책)의 일환이자 강화조약 제11조에서 ‘수락’한다고 되어 있지만, 그 의미를 둘러싸고 여러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1부 샌프란시스코 강화체제」중에서
전후처리의 기반인 ‘강화체제’가 완성되고 일단락된 것은 1970년대이다. 강화조약을 기점으로 동남아국가들과의 평화조약과 배상협정이 체결되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1972년 중일공동성명에 이어서 1978년 중일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아시아 주변국가들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재건되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강화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정부 간 화해’의 틀 속에서 전쟁과 식민지통치, 점령지배에 기인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아시아태평양의 국제질서 안정에 기여하고, 국내적으로는 ‘자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노력’이 성과를 거둔 셈이다.
이때까지 나라 안팎에서 제기된 ‘역사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는 배상이나 책임의 문제 등 새로운 부담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부심해 왔는데, 그 기반이 된 것은 강화체제였다.
그런데 아시아 주변국들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는 것은, 역사 문제가 발생하면 곧바로 국가 간의 문제로 발전하고 국제적인 비난을 당할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뜻이다. 이 경우에도 강화체제는 효력을 발휘해야 하지만(하는데) 1980년, 특히 나카소네내각 시기에 국내의 역사 문제인 교과서 문제와 야스쿠니 문제가 ‘국제화’하고, 국가로서의 전쟁에 대한 인식과 전쟁책임에 관한 문제가 다시 부각되어 비난을 당하게 되었다.
1980년대 유족원호법 등의 적용을 요구하는 일본인 ‘전쟁희생자’에 대해, 국가는 어떻게 인식하고 보상하고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한다. 그 처리 여하에 따라서는 강화체제의 안정이 흔들릴 수도 있다. 이때 고안된 것이 일본인 전쟁희생자에 대한 ‘국민적 고통분담’과 ‘공평’이라는 원칙에 따른 국가의 보상 방식이다. 이는 국내에서 발생한 전쟁책임론이나 보상요구의 분출을 억누르기 위한 논리였다. ---「2부 1980년대, 공평과 고통분담」중에서
전후 일본이라는 국가는 신헌법 하에서 과거의 역사에 대해 어떠한 해석도 내리지 못했다. 그보다는 국민들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과 자유로운 역사인식의 공존을 보장하고 있다.
국가가 일정한 역사해석을 내놓는 역사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로서는 역사 문제가 국내정치의 안정, 또는 국제협조를 해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 간의 화해를 실현한 ‘강화체제’는 역사 문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는 이러한 강화체제가 정착되었고 그 후 일어나게 되는 역사 문제를 봉쇄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는 위안부 문제 등 주변국들로부터 ‘전후보상 문제’가 분출하자, 강화체제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역사화해정책’을 모색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외부적으로는 강화체제를 지탱해주었던 냉전이 종식되고, 내부적으로는 자민당 지배체제가 흔들리고, 나아가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상승한 것이 그 배경이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강화체제의 안정성을 뒤흔들었다.
전후보상 문제의 대부분은 이미 도쿄재판이나 아시아 주변국들에 대한 배상 협상과정에서 제기되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긴 냉전과 자민당 지배가 이 문제들이 드러나는 것을 막고 봉쇄해 왔던 것이다.
이제 ‘역사 문제’에 대한 대응은 사죄나 반성이라는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보상’을 수반하는 ‘역사화해정책’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는 경제대국으로서의 일본이 어떻게 국제적인 책임을 다할 것인가라는 과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시아여성 기금, 평화우호교류계획, 중일·한일 역사공동연구 등은 이러한 모색의 하나였다.
이 가운데 아시아여성 기금 참여를 권고하는 글에서 ‘국민적인 보상’의 의미에 대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제 역사 문제는 국가나 정부 간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과 시민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는 이제 국제적인 인권 문제로서 다루어지고 있지만, 이렇게 시민사회 차원에서 논의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야스쿠니신사 문제다.
---「3부 세기 전환기-냉전과 55년체제 붕괴 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