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트랜스젠더는 종종 치명적인 위협을 마주친다. 그 위협에 맞선 저항은 열망할 가치가 있는 사회 정의를 위한 전망의 일부여야 한다. 트랜스젠더 쟁점을 망라하는 페미니스트 정치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를테면 비장애 페미니스트가 장애 여성이 직면하는 문제에 주목해야 하는 일하고 다르지 않다. 현실에서는 언제나 그렇지는 않아도 최소한 이론적으로 우리는 억압의 복합적 축을 동시에 다루는 법을 알고 있다. 대개 부족한 것은 지배적이거나 다수자 위치에 있는 사람이 특정 소수자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의식이나 인식이다.
--- p.10~11
이 책의 목표 중 하나는 트랜스젠더 사회 변혁 운동을 확장된 페미니즘의 틀에 위치시키기다. 그 작업은 개인적인 것이 어떻게 정치적인 것인지, 그리고 젠더에 따른 억압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한다. 트랜스젠더 페미니즘은 1960년대 후반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지금은 종종 제3의 물결 페미니즘이라고 불리는 흐름의 일부분이다.
--- p.21~22
정부의 우편물 감시 정책에 따른 프린스의 외설 사건은 초기 트랜스젠더의 정치사를 냉전이 한창이던 무렵 국가 안보에 관련된 반공 히스테리의 맥락에 위치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런 변화는 그 무렵 되풀이되던 ‘분홍색 공포’하고 특히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 무렵 그런 ‘변태들’이란 품성도 수상할뿐더러 위법한 ‘라이프스타일’ 탓에 적국의 협박이나 착취에 취약해진다는 편집증적 신념에 근거한 마녀사냥에 떠밀려 동성애자들은 정부, 산업, 교육에서 배제됐다. 따라서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 부상한 트랜스젠더 정치는 동성애를 향한 공적 박해하고 분리할 수 없다. 트랜스젠더 정치는 프라이버시, 검열, 정치적 반대, 소수자 권리, 표현의 자유, 성적 해방에 관한 많은 것을 아우르는 일련의 중요한 투쟁의 일부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 p.92~93
8월의 어느 주말 밤(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다), 터크 로와 테일러 로 모퉁이에 있는 24시간 카페테리아 컴튼스는 평소처럼 많은 드랙퀸, 남성 성노동자, 빈민, 여행자, 가출 청소년, 무일푼 단골들로 소란스러웠다. 많은 돈을 쓰지도 않으면서 테이블에 죽치고 앉아 있는 젊은 퀸 무리에 짜증이 난 가게 관리인은 이 사람들을 몰아내려고 경찰을 불렀다. 여름 내내 점점 더 잦아진 일이었다. 컴튼스의 모든 손님을 태연히 거칠게 다루는 데 익숙한 험상궂은 경찰관이 한 퀸의 팔을 붙잡고 그 여자를 끌어내려 했다. 그런데 그 여자가 갑자기 경찰관의 얼굴에 커피를 뿌렸고, 난투극이 벌어졌다. 깜짝 놀란 경찰관에게 접시, 쟁반, 컵, 은식기가 날아들었고, 경찰관은 밖으로 달려 나가 지원을 요청했다. 컴튼스에 있던 손님들은 테이블을 뒤집고, 판유리 창문을 박살냈으며, 식당 밖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범죄인 호송차가 도착했고, 컴튼스 인근 터크 로와 테일러 로 모퉁이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드랙퀸은 경찰을 무거운 핸드백으로 때리고 하이힐로 걷어찼다. 경찰차가 부서지고 신문 가판대는 잿더미가 됐다.
--- p.107~109
컴튼스 카페테리아의 트랜스젠더 억압에 맞선 폭력적 저항은 텐더로인의 트랜스젠더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저항은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가 트랜스젠더 시민하고 다르게 관계 맺을 수 있는 공간을 창조했다. 실제로 도시는 트랜스젠더를 그저 처리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적법한 요구를 지닌 시민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식 변화는 현대 트랜스젠더 사회 정의 운동을 바꾼 결정적인 한 걸음이며, 국가 권력과 사회적 정당성을 상대로 하는 새로운 관계 맺기의 시작이었다.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운 트랜스젠더 여성이 거리에서 직접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 p.121
트랜스젠더리즘과 동성애는 19세기 이래로 개념적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였고, 1950년대와 1960년대 내내 트랜스젠더 정치, 동성애 친화형 운동, 동성애자 해방 운동은 나란히 진행되면서 때때로 서로 교차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는 이렇게 공유한 역사에 분수령이 된, 트랜스젠더 정치 운동이 동성애자 공동체와 페미니스트 공동체하고 맺은 동맹을 잃어버린 시기였다. 이런 상실은 1990년대 초까지 회복되지 못했으며, 많은 부분 아직도 완전히 극복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동성애자 해방 운동과 페미니즘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발전으로 여겨지는 반면, 트랜스젠더에게 동성애 해방 운동과 페미니즘은 종종 반동의 또 다른 일부였다.
--- p.149~150
1973년은 미국 트랜스젠더 정치사에서 최악의 상황을 상징한다. 트랜스젠더는 하나의 젠더에서 다른 젠더로 이행할 때 여전히 가족과 친구의 상실, 주거와 고용 차별, 고도의 사회적 낙인, 폭력을 경험할 상당한 위험을 일상적으로 직면했다. 오랜 반트랜스젠더 편견은 새로운 차원의 치료하고 맞물려 ‘병리화’를 보건 서비스와 더 나은 삶에 이르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만들었다. 진보적 정치 운동은 트랜스젠더가 병들었다고 말하는 의료 시스템을 비판하기보다는, 트랜스젠더가 가부장적 젠더 체계에 잘 속는 정치적으로 퇴행한 봉인데다 기껏해야 의식을 고양시켜 마땅한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 p.158~159
대부분의 트랜스젠더 지지자는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를 남성이나 여성의 존재 방식을 묘사하는 형용사로, 또는 그런 표식에 따른 범주화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계급이나 인종이나 신체 능력처럼, 그 사람들에게 ‘트랜스젠더’는 성적 정체성의 분리된 ‘종’을 서술하는 명사보다는 성적 지향 범주에도 교차하는 서술적 용어로 기능했다. 다시 말해 트랜스젠더 남성은 흑인이거나 가난하거나 장애인일 수 있듯이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양성애자일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비트랜스젠더 게이와 레즈비언은 ‘T’를 정확히 자기의 공동체에 덧붙일 새로운 종류의 성적 정체성으로 여겼다.
--- p.211~212
젠더 규범 위반에 맞선 차별이 합법으로 남아 있는 반면, 젠더 규범에 순응하는 게이와 레즈비언은 점점 더 주류의 승인을 받을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 오래된 LGBT 운동은 분열 중이며, 트랜스젠더 쟁점은 이제 명확히 사회 정의라는 의제의 최첨단에 자리하고 있다. 미디어는 트랜스젠더 재현에 점점 더 수용적이고, 젊은이들은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 정체성과 행위를 점점 더 편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미래의 언젠가,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트랜스젠더는 마침내 완전하고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 p.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