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 그 편찬의 역사
『삼국사기』는 기전체의 역사책이다. 기전체란 왕을 중심으로 그의 전기(傳記)를 서술하여 한 시대의 역사를 구성하는 방법이다. 이 책은 고려 인종이 김부식 등에게 명을 내려 편찬케 한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시대의 역사책으로 서기 1145년 인종 23년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 13세기 고려 25대 경왕(충렬왕) 때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와 더불어 우리 고대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책은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열전」의 순서로 쓰였다.
서기 1174년 고려 명종 4년에 남송에 『삼국사기』를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玉海)』라는 책에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 첫 판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년)에 이미 인쇄하여 발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2차 판각은 13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이 책은 현재 남아 있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편찬 참여자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의 명령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안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온, 김충효, 정습명 등 11인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10인의 편찬자들은 각 나라별로 책임을 맡아 자료의 수집과 정리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편찬에 이용된 자료
이 책은 편찬자들의 독단적인 서술이나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고기(古記)』,『삼한고기』,『신라고사』,『구삼국사』와 김대문의 『고승전』,『화랑세기』,『계림잡전』 및 최치원의 『제왕연대력』 등의 국내 문헌과 중국 역사책인 25사의 상당 부분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이때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올리는 표문, 각 부분의 머리말 부분,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논평을 덧붙이는 논찬, 여러 사료들 가운데서 쓸 것은 쓰고 버릴 것은 버리는 작업, 목록의 작성,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했을 것이다.
고려의 시대상
역사는 시대에 따리 해석을 달리 해야 하는 만큼, 편찬 당시의 정치 사회적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당시 고려는 거란을 물리쳤지만 여진족이 호시탐탐 쳐들어 올 궁리를 하고 있었기에 국가와 민족의식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었다. 또한 유교와 불교문화가 융합됨으로써 고려왕조가 안정되는 과정에서 전 시대의 역사 정리가 필요했다. 따라서 국사의 새로운 편찬은 단순한 유교 정치이념의 구현만이 아니라 민족의식의 차원에서 필요했다.
또한 당시의 고려사회는 무신들을 억누르고 문인들을 우대한 시기였으므로. 문인 우대정책으로 문벌 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벌귀족 간의 갈등과 대립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특히 김부식과 윤관 집안의 대립, 김부식과 당시의 최고 권력자였던 이자겸의 충돌 등 문벌가문들 간의 갈등이 겹친 시기였다.
편찬의 목적
『삼국사기』를 올리는 김부식의 표문에서 『삼국사기』의 편찬 동기와 목적 및 방향을 엿볼 수 있다.
김부식은 당시 지식인들조차도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탄식하면서 『삼국사기』를 펴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중국 역사책들이 우리나라의 사실을 너무 짧게 기록하였으니 우리 역사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써야 한다.
둘째, 고려시대에 있었던 『고기』라는 역사 기록의 내용이 빈약했기 때문에 다시 삼국의 사건이나 편찬자의 생각 등을 차례대로 기록해야 한다.
셋째, 『삼국사기』가 단순히 옛날의 기록만이 아니라 왕, 신하,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후세에 교훈을 주고자 하는 목적의식이다.
김부식은 분열과 갈등을 국가 멸망의 원인으로 강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현실을 비판하였고 이를 후세에 알리고 역사의 교훈을 주기 위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특징
첫째, 처음부터 삼국을 하나의 완성된 국가로 보았으며, 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파악하였다.
김부식은 서기 1세기부터 삼국이 국가로 성장한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국가성립에 큰 업적을 이룩한 고구려의 태조대왕, 백제의 고이왕, 신라의 내물왕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또한 김부식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하는 현상을 하나의 발전사관으로 파악했다. 그는 신라가 고려로 바뀌는 것을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둘째, 역사의 내용을 하늘과 땅 사이의 관념적 사고로 파악하였다. 김부식은 자연의 변화와 인간 활동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역사의 내용을 뽑아 냈으며, 그 과정에서 왕의 정치행위가 진행된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역사를 교훈으로 삼았다. 지도층의 분열 때문에 실패로 그친 백제, 고구려 부흥전쟁을 지도층의 내분과 함께 엮어 분열과 갈등을 경계했다.
따라서 김부식은 묘청 일파의 패배나 견훤왕, 궁예왕의 멸망 등을 완벽한 통일에 대한 분열의 선동과 그에 대한 응징으로 설명했다.
끝으로 열전을 통해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의 사심을 버리고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힘쓰는 공적인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는 인간의 도리를 매우 크고 중요하게 여기는 일관된 관점을 바탕으로 한다.
『삼국사기』의 문제점
『삼국사기』가 줄곧 사대주의 시각에서 기술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당 태종이 요동을 공격할 때, 잠시 고구려의 위엄을 기술하기도 했다. 이는 편찬자들의 생각이 서로 달라 벌어진 일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의 왕들이 서토의 왕에게 조공을 드렸으며 책봉을 받았다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서토를 정벌하고 영토를 크게 늘린 광개토태왕이나 수나라 3백만 대군을 물리친 영양태왕 등 고구려의 태왕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 국가였다. 심지어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당나라 사신을 구금하기까지 했다. 그런 이들이 적국인 서토의 나라들에게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았다는 것은 전혀 납득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주의로 일관하여 역사를 기술한 것은 심각한 문제점일 수밖에 없다.
그 당시 김부식은 평양세력들이 일으킨 묘청의 봉기를 토벌한 후 『삼국사기』의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출정(出征)에 앞서 인종의 허락도 받지 않고 단지 평양천도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정지상을 비롯하여 김안, 백수한 등을 대궐로 유인해 죽여 버릴 정도로 평양파를 미워했다.
이런 행위를 미루어, 신라 김씨의 후손인 그에게는 웅혼한 기상을 갖고 있는 고구려의 기질을 말살시키려는 아집도 다분히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백제를 너무 간략하게 취급한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 『남제서』에 분명한 기록이 있는 대륙백제도 고의로 누락시켰음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읽어야 하는 이유
『삼국사기』는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역사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와 더불어 우리의 고대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이 책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비롯한 삼국과 주변 국가들의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어 우리 조상들의 시대적인 상황과 모습을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에 읽어야 하는 것이다. 『부모와 함께 읽는 삼국사기』에는 비판 능력이 없는 어린 독자층을 배려하여 본기는 생략하고 지와 열전 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아 수록했다. 원저자의 뜻을 살려 원문대로 되도록 고풍스러운 맛이 나게 평역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