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제국이 수백 년 동안 안정된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세습에 의한 왕위계승 원칙을 확립한 데에 있었다. 이스람교의 교리에서는 주권자의 선출은 선거에 따르고 세습은 인정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이른바 정통 칼리프 4대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옴미아드왕조ㆍ아바스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지방의 작은 정권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습에 의한 왕조가 형성되었다. 물론 이때도 선거제의 원리는 아직 살아 있었으며, 그 때문에 왕위계승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 혼란이 야기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오스만제국은 이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개념을 창출했다.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주권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의 소유였다. 술탄의 가족들은 주권의 소유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술탄의 아들들은 지방 총독에 임명되어 임지에서 작은 왕국을다스렸다. 남자가 14세쯤 되면 할례의식을 받아 성년남자로 인정되며, 각 왕자는 아나톨리아 각지의 행정을 담당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임지에서 그들 업적이 관찰되어 술탄에게 보고되었으며 술탄은 왕자들의 능력을 판단하여 후계자를 결정했다. 지명된 후계자가 즉위한 뒤 스스로 술탄이라고 일컫는 자가 나타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오스만제국은 한 가지 방법을 채택했다. 메메드 2세 때에 이 방법은 법률로 공포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나의 아들 가운데 누구에게나 술탄 자리를 물려줄 수 있다. 단, 즉위한 자는 세계 질서를 유지학 위하여 자기의 형제를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많은 신학자들도 이것을 시인하고 있다. 따라서 그렇게 실행토록 하라.
이것이 뒤에 '형제 살육'으로 알려진 제도다. 오스만제국에서 이 제도는 형제뿐만 아니라 술탄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모든 남성에게 적용되었다. 여성은 술탄의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이 잔혹한 운명을 면할 수 있었다.
--- pp.305~306
그러나 유럽도 로마제국 붕괴 이후 민족대이동의 파도가 차차 가라앉고 새로운 봉건제와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안정과 진보를 향한 발걸음을 내딕기 시작했다. 따라서 유럽이 언젠가는 반드시 아시알ㄹ 반격하리라는 것은 에측 가능한 사실이었다. 그러한 기운은 이미 11세기 이전부터 싹트고 있었지만,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아른바 십자군이다. 그리스도교도의 대동단결운동인 십자군의 기원은 1071년에 셀주크투르크 군대가 콘스탄티노플 군대를 격파한 데서 비롯된다. 1073년에는 뒤에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된 힐데브란트가 동서로마교회의 통일전선과 그리스도교도의 단합을 부르짖었으며, 독일의 하인리히 4세도 세속적인 입장에서 이에 호응했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동로마의 구원뿐만 아니라 성지 예루살렘 회복을 위한 대원정군의 조직을 역설했다. 이에 따라 제 1차 십자군 30만이 유럽 각지에서 속속 출발하였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을 구원하고, 1099년에는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십자군은 11세기말~13세기말까지 약 200년 동안 8차에 이르는 원정을 거듭했고, 십자군원정이 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유럽은 오랜 중세의 미몽에서 깨어나 새로운 자각과 발전의 터전을 마련 할 수 있었다.
--- p.251
632년 2월에 거행된 메카의 대제는 무함마드 자신이 지휘한 행사였다. 그는 미나 골짜기에서 모여든 군중을 향하여 낙타 등에 올라앉아 설교를 했다.
“여러분,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이후에 다시 여러분과 함께 이곳에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 모든 무슬림(이슬람 신자)은 한 형제입니다. 여기 모인 당신들은 모두 평등합니다…….”
이것을 고별 순례라 한다. 이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로 돌아오자 그의 건강은 갑자기 쇠약했져다. 아내 중의 하나인 마이무나에게 가 있을 때 기분이 언짢아졌다. 보통 병이 아님을 깨닫고 그는 아내들의 동의를 얻어 아이샤의 방으로 정양하기로 했다. 그는 632년 6월 8일(일설에는 6월 11일) 해뜰 무렵부터 정오 사이의 어느 시간에 고통으로 가누지 못하는 몸을 가장 사랑하는 아내 아이샤의 부축을 받아 반쯤 일으킨 채 임종했다. 그의 파란 많았던 슬기로운 영혼은 알라신 옆으로 날아 올라갔다고 전한다.
--- pp.59~60
《천일야화(千一夜話)》라고도 불리는《아라비안나이트》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텍스트는 불과 몇 장밖에 없으며, 이슬람력 266년 사파르의 달에 씌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879년 9~10월에 해당하며 하룬이 죽은 지 70년쯤 뒤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는 대개 180가지인데, 하룬 알 라시드가 등장하는 것만도 50가지에 달한다.
이 이야기는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 중세 페르시아어로 씌어진 것인데, 아바스왕조 초기에 아라비아어로 번역된 듯하다. 하룬시대에는 이미 이 설화집이 나와 있었다. 그 내용도 오늘날의 것과는 매우 달라서 하룬이 등장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들어가 있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훨씬 후세에 전설화되고 미화된 모습이 가미되었으며, 그것이 전해 오던《아라비안나이트》속에 편입된 것이라는 설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하룬은 실제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결코 위대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경건한 무슬림이었고, 이교도의 나라 비잔틴과 싸웠기 때문에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이슬람사회에서 이상적인 인물로 승화되었다.
가장 오래된 9세기의《아라비안나이트》는 이미 갈색으로 바랜 아라비아종이에 씌어졌다. 종이는 중국에서 뒤늦게 전래된 것이다. 794년에 일어난 중앙아시아 탈라스 강변 싸움이 있은 뒤에 포로로 잡혀간 당나라 사람이 사라르칸트에 제지소를 세우고 종이 만드는 법을 전했다. 794년에는 바르마크집안의 파들이 바그다드에 제지소를 세웠다. 정부 문서에도 종래 쓰여 오던 파피루스 대신 종이를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하룬시대에 일로 그것을 건의한 사람은 바르마크짐안의 자파르였다. 이후 종이는 양피지ㆍ파피루스 대신 쓰였고, 이집트와 북아프리카ㆍ이베리아를 거쳐 유럽에까지 퍼졌다. 바르마크가문은 종이 보급에도 공헌한 것이다.
--- p.140~141
《천일야화(千一夜話)》라고도 불리는《아라비안나이트》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텍스트는 불과 몇 장밖에 없으며, 이슬람력 266년 사파르의 달에 씌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879년 9~10월에 해당하며 하룬이 죽은 지 70년쯤 뒤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는 대개 180가지인데, 하룬 알 라시드가 등장하는 것만도 50가지에 달한다.
이 이야기는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 중세 페르시아어로 씌어진 것인데, 아바스왕조 초기에 아라비아어로 번역된 듯하다. 하룬시대에는 이미 이 설화집이 나와 있었다. 그 내용도 오늘날의 것과는 매우 달라서 하룬이 등장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들어가 있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훨씬 후세에 전설화되고 미화된 모습이 가미되었으며, 그것이 전해 오던《아라비안나이트》속에 편입된 것이라는 설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하룬은 실제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결코 위대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경건한 무슬림이었고, 이교도의 나라 비잔틴과 싸웠기 때문에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이슬람사회에서 이상적인 인물로 승화되었다.
가장 오래된 9세기의《아라비안나이트》는 이미 갈색으로 바랜 아라비아종이에 씌어졌다. 종이는 중국에서 뒤늦게 전래된 것이다. 794년에 일어난 중앙아시아 탈라스 강변 싸움이 있은 뒤에 포로로 잡혀간 당나라 사람이 사라르칸트에 제지소를 세우고 종이 만드는 법을 전했다. 794년에는 바르마크집안의 파들이 바그다드에 제지소를 세웠다. 정부 문서에도 종래 쓰여 오던 파피루스 대신 종이를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하룬시대에 일로 그것을 건의한 사람은 바르마크짐안의 자파르였다. 이후 종이는 양피지ㆍ파피루스 대신 쓰였고, 이집트와 북아프리카ㆍ이베리아를 거쳐 유럽에까지 퍼졌다. 바르마크가문은 종이 보급에도 공헌한 것이다.
--- p.140~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