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오늘날 착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측할 수 없는 위험과 재난이 늘어나고 일상적이고 구조적으로 고통스러운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착한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수치심이나 죄책감에 익숙해지고 있다. 수천만 국민에게 한 약속을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도 미안하기는커녕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정직하게 자신의 삶을 살다가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부끄러워하는 시대다.
---「착한 사람들의 나쁜 사회」중에서
‘세월호’는 우리가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이라는 이유로 멈춰서는 안 되는 ‘끝이 없는 이야기’이어야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세월호’라는 배를 함께 타고 도착항 없는 항해를 떠나야 한다. 우리는 세월호를 통해 문제를 확장하고 사유를 창조해야 한다. 모든 철학이 그렇게 탄생했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 새로운 이념,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 그리고 새로운 인간이 될 것이다.
---「세월호, 끝이 없는 이야기」중에서
집단지성은 고립을 넘어 연대로, 소수의 독점이 아닌 개별성의 총합을 지향한다. 그것을 통해 지배와 독점, 불평등, 폭력에 대한 저항의 형태도 달라질 것이다.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 사소한 사건이 새로운 저항의 출발점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패러다임도 근본적으로 수정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추구하던 가치의 변화를 의미한다. 경제적 부의 축적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나눔과 공유, 공개와 개방, 참여와 자치 등의 가치를 새롭게 규정하고 수용함으로써 과거와는 전혀 다른 개인과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집단지성의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무엇보다도 집단지성의 파괴력은 그러한 지성의 크기와 힘에 대한 예측불가능성에 있다.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중에서
강신주는 철학과 인문학의 이름으로 반제도, 반권력, 반자본주의를 지향한다. 하지만 그의 비판 논리는 어느 순간 개인으로 치환된다. 그것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기업가를 닮아 있다. 자신이 대학원을 옮겨가면서 지도교수와 싸워가면서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자본이나 권력 등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남들은 평생 한 권도 힘든 베스트셀러를 몇 권이나 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밖에 못 사느냐고 윽박지른다. 그 앞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고 혐오하는 자기계발이나 힐링 담론의 멘토들을 닮았다. 무엇보다 강신주는 대중을 직접 만나지만 그들을 알지 못한다. 상대가 누구라도 즉석에서 해답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그/그 녀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되풀이할 뿐이다. 개인들의 역사, 즉 그들의 삶은 외면당하고 만다. 그의 철학은 권력이 됐다.
---「강신주와 철학자의 자리」중에서
지금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복고 열풍은 삶에 대한 포기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징후다. 그것은 좌절의 끝에서 나타나는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죽음을 앞둔 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죽음 그 순간이나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추억하고, 후회한다. 현재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복고 열풍은 대중의 정서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정확히 보여준다.「응답하라 1988」의 ‘진주’는 1983년생이다. 진주에게 2016년의 대한민국은 ‘헬조선’으로 호명된다. 더 이상 변화를 추구하지도 혁명을 꿈꾸지도 않는 퇴행적 삶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삶이란 말인가.
---「응답하라 2016」중에서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의 발달에 따라 권위의 상징인 아버지의 위상이 점차 추락해왔다는 사실을 수용한다면, 오늘날 아버지에 대한 호명은 어쩌면 남성(성)에 대한 호명과 다르지 않다. ‘상남자’에 대한 선호가 회자되는가 하면, 「진짜 사나이」나 「푸른거탑」과 같은 군대 관련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한 예다. 다시 말해 강력한 힘과 권력, 카리스마에 대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최근 남성 중심적이고 독재자를 숭배하는 ‘일베’의 등장이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이 아닌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부성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 사회의 개인들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왜 지금 ‘아빠’인가」중에서
소치 동계올림픽 기간 중 어느 광고에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 너는 한 명의 대한민국이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개인을 대한민국으로 동일화하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공정함을 외쳐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비정상화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판정 논란을 통해 부당함을 호소하고 분노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정상화를 정상화로 바꾼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김연아는 언론과 국민 들의 엄청난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대한민국과 동일화시키지 않는 위엄을 지켰다. ‘나는 대한민국이 아니다’라고 외친 것이다. 아름다운 은퇴 무대였다.
---「나는 대한민국이 아니다」중에서
오늘날 청년들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들의 표정에서 우리는 어떤 고통이나 절망을 읽어낼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 등 개인적인 문제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무표정한 얼굴은 사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것은 단기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청소년기부터 수년 동안 형성된 일종의 습속에 가깝다. 일상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습득한 것이다. 그러한 무표정은 또래 집단 사이에서도 작동한다. 특별하게 친밀한 집단 외에는 굳이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대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공동체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연계나 네트워크가 존재하지 않는 삶의 연속이다. 그 결과 청년세대는 자신의 삶의 궤적에서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것은 스마트폰을 비롯한 테크놀러지의 발달, 1인 가구의 확산 등 다양한 사회적 조건에서 고착화된다. 결혼이나 가족의 구성은 다양한 방식의 공동체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경험은 구체적인 이웃과의 사랑이나 연대로 확장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은 청소년기부터 청년기를 거치는 동안 그 어떤 공동체도 경험하지 않을 수 있는 위험한 사회인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정치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달관세대는 없다」중에서
대학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다. 청소노동자, 시간강사를 비롯한 비정규직 교수, 비리 사학 재단, 등록금 문제 등 다양한 모순과 갈등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대학이다. 청소노동자는 최저임금 수준의 노동과 온갖 차별을 감당하고, 시간강사들은 추운 방학을 두려워하고, 계약직 교수들은 혹시라도 불이익을 당할까봐 영혼 없는 강의를 하고, 학생들은 방학에도 등록금 마련을 위해 알바를 하느라 잠시도 쉴틈이 없다.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대학의 한 시간강사는 대통령 당선자와 학교 당국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모든 강의를 박탈당했다. 그는 아직도 고통의 수렁에서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편안한 날들이 이어진다. “교수님, 안녕들 하십니까.”
---「교수님, 안녕들 하십니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