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허튼소리’로 일축한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뒤샹의 사례를 들어 이 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른바 ‘거대 관념’들은 접근이 어려운 것이어서 우리는 그 앞에서 잘해야 왜소해지는 느낌을, 최악의 경우 쓸모없고 무지한 느낌을 갖게 된다. -10쪽
인간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학습하는데, 놀이는 자긍심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성인이 된 인간은 다른 일들에 정신이 팔려 놀이 자체를 위해 놀이를 하고 상상력에 탐닉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그러니까 플라톤은 놀이를 통해서만 반영되고 표출될 수 있는 우리의 순전한 본래 자아를 재발견하라고 촉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36쪽
마르크스가 종교를 지배계급이 대중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고안하고 유지하는 일종의 마약이라 주장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는 그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들에 집중했고 그중에서도 관념적인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을 묘사하고 있었다. -72쪽
달리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그 자신의 주장마저 무효화하는 셈이다. 《논리철학론》의 철학적 성취조차 그 자체로 유용한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므로, 한 번쯤 음미한 후 폐기해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책은 이런 선언으로 끝맺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 -113쪽
죽음만이 삶의 ‘치유할 수 없는 병’으로부터 유일한 해방구이며 ‘고통도 시신만은 손대지 못하는 법’이라는 문구에서 보이듯 그는 천국이 됐든 지옥이 됐든 내세에 대한 의지 없이 죽음의 불가피성을 명료하게 숙고하고 있다. 161쪽
‘하느님이 죽음처럼 자연스럽고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인간에 대한 재앙으로 예정했을 리 만무하다.’라는 문장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장해 대중을 길들이고 갈취하려 했던 당시 기독교 권력에 대한 그의 혐오를 잘 드러내고 있다. 스위프트는 죽음과 내세에 대한 두려움을 신의 의지에 반하는 감정이라고 강조했다. -166쪽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20년대에 친구 막스 보른과 양자역학의 한 문제에 관해 대화하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꺼냈는데, 사실 그것은 종교적인 맥락이 아니라 수학의 발산 개념에 대한 의견 차이의 표현일 뿐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는 물리 법칙에 의거해 전적으로 예측가능하다는 신념을 지녔으나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은 단순히 우연에 불과한 부분들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위의 인용문에서 ‘신’이라는 단어는 항구적이고 안정된 법칙에 대한 신념을 우의적으로 표현할 뿐 어떤 실재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1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