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의 사촌 오빠 민준수는 어릴 때부터 알아주는 수재였다. 거기에 외모도 뛰어나게 수려해서,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는 내내 늘 인기가 많았다. 단지 성격이 워낙 그 모양이라 직접 접근해서 귀찮게 구는 여자애들은 별로 없었지만, 대신에 사촌 동생인 자신이 언제나 들들 볶이곤 했다. 오빠 좀 만나게 해달라는 둥, 편지를 전해달라는 둥,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는 둥.
즉 본의 아니게 혜정은 소싯적부터 민준수와 다른 여자애들 사이에 끼게 된 적이 꽤 많이 있었다. 그리고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심지어 그게 지역 전체에서 예쁘기로 소문이 자자한 여자애라 해도 사촌 오빠의 태도는 늘 일관적이었다. 관심 없음.
그래서 승연에게도 처음부터 그렇게 딱 말했던 거였다. 사귀라는 거 아니다, 결혼하라는 거 아니다, 그냥 딱 한 번 만나만 봐라.
물론 승연에게 내심 미안하기는 했다. 그 더러운 성질머리를 한 제 오빠를 소개시키는 게. 하지만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준수가 좀 무례하게 굴더라도 승연이라면 화내지 않고 넘어가줄 것 같았다. 혜정의 친구들 중 그 누구보다도 마음이 넓은 게 승연이었으니까.
그 너그러움에, 혜정은 눈 딱 감고 이번 한 번만 기대기로 한 거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인간 민준수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니, 기대 이상이었다. 약속에 좀 늦었기로서니 있는 대로 성질을 내고는 - 물론 승연은 그렇게까지 표현하지 않았지만 안 봐도 비디오였다 - 차 한 잔 안 마시고 사람을 면전에서 돌려보냈다는 게 아닌가!
그런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혜정은 승연에게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비록 잘될 거라고 생각하고 주선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홀대를 당할 줄은 몰랐다.
‘어디 두고 봐. 언젠가 내가 꼭 갚아준다.’
마음씨 착한 친구에게 못된 성질머리를 부린 제 오빠에게 속으로 칼을 갈며, 혜정은 당장 그다음 날부터 대학교 졸업 앨범을 뒤지기 시작했다. 앨범을 홀라당 다 뒤져서라도 제일 괜찮은 남자를 골라내서 승연에게 소개해줄 셈이었다.
그런데 웬걸, 앨범을 채 반도 보기 전에 준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 잠깐 병원으로 좀 와.
언제나 그렇듯이 제 용건만 말하고 나서 전화는 뚝 끊겼다. 혜정은 휴대전화를 가자미가 되도록 흘겨보다 씩씩거리며 병원으로 향했다.
“오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혜정이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목청을 높이는데,
“직업이 뭐랬지?”
준수가 대뜸 물었다.
응? 혜정은 잠시 주춤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직업을 얘기하는 건가.
“뭔 소리야? 누구 직업?”
“이승연 씨.”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분명히 말해줬는데 이 작자,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었던 거다!
“참 빨리도 묻는다. 어제 그런 식으로 돌려보내놓고 이제 와서 그건 왜?”
혜정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준수는 승연을 똑바로 쳐다보며, 세 번째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직업이 뭐냐고 물었어.”
평소보다 좀 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혜정은 속으로 찔끔했다. 민준수는 애초에 도화선 자체가 짧은 인간인 데다 폭발력도 어마어마했다. 즉 인내심도 짧은데 화나면 무섭기까지 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사촌 오빠는 진심으로 승연의 직업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빨리 말해주지 않는 데 짜증이 나 있다. 오랫동안 민준수를 보아온 자의 생존 본능으로, 혜정은 즉각 대답했다.
“김밥집 한다니까.”
“김밥?”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직접 가게를 한다고? 거기서 일하는 게 아니라?”
“글쎄, 걔가 김밥집 주인이라니까. 엄마 돌아가시고 하던 가게 물려받아서 계속 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것도 그때 다 말해줬잖아! 혜정은 속이 터졌다.
잠시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준수가 곧이어 다시 물었다.
“가게는 어딘데?”
그제야 혜정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주지하다시피 민준수는 애초에 연애 감정이라는 것 자체를 어머니 배 속에 깜빡 잊고 나온 인간이다. 그런 준수가 무려 여자에 대해 묻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아무리 먼 기억을 더듬어봐도 분명 초유의 사태였다.
‘설마 관심이 있는 건가?’
하지만 곧바로 그건 아니지 싶었다. 승연이 마음에 들었다면 어제 만났을 때 그렇게 면박을 줘서 돌려보내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럼 대체 왜 묻는 거지?’
설마 가게까지 찾아가서 또 성질을 부리려는 건……. 혜정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준수의 잘생긴 눈썹이 험악하게 치켜 올라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차, 폭발 직전이구나.
“우리 가게 바로 길 건너편 상가 1층.”
혜정은 얼른 사실대로 고해바쳤다. 그제야 준수는 표정을 풀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하듯이.
“됐어. 그만 가봐.”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사람을 불러내서는 겨우 딱 두 마디 묻고는, 이제 용건 끝났으니까 가봐라?
그나마 있던 정나미도 뚝 떨어졌다. 내가 다신 이 인간하고 상종을 하나 봐라! 혜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사촌 오빠를 한 번 노려봐주고는 등을 돌렸다.
혜정이 나가는데도 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조차 않았다. 준수의 병원을 나오며 혜정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대체 저 인간이 무슨 꿍꿍이지?’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