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로 들어오면서 소리의 과학적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음향학(acoustics)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음악에 도움을 주기 위한 음에 대한 과학적 탐구 과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음향학자(acoustician)’란 파리 과학 아카데미의 제3부 중 음계와 정률을 연구하는 수학적인 그룹의 구성원을 지칭하는 말로 처음 사용되었다. 한편, 뉴턴의 뒤를 이어 다양한 진동계의 수학화 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 테일러(Brook Taylor, 1685-1731), 베르누이(Daniel Bernoulli, 1700-1782) 같은 수학자들이 편미분 방정식을 사용해 현, 막대, 막, 판 등 다양한 진동계의 운동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해석학(analysis)은 새로운 물리과학 분야로서 자리 잡게 되었고 미분 방정식을 취급하는 수학적 방법이 물리적 세계의 이해와 긴밀히 맞물리면서 발전했다. ---pp.30-31
19세기 전반 미국 과학의 상황에 대해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미국이 유럽의 과학을 따라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던 반면, 기구 제작 능력은 많이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물질적 기반의 미확보가 미국 과학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유럽의 과학을 수입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것은 수학이 포함되지 않은 과학 지식이었다. 이것은 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번역하는 일로 충족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가져오는 방식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인의 필요에 맞도록 책을 다시 쓰는 일이 많아졌다. 이론적 과학의 수입에 머물지 않고 실험을 직접 재현하려는 의욕이 강해졌을 때 가장 큰 장애물은 실험 기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실험 기구를 확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실험 기구를 수입하는 것이었다. ---p.47
19세기 미국 음향학에 대해서 논의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음향 기술의 약진이다. 이것은 전화기와 축음기의 발명으로 대표되는 것으로 기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다. 이 기술들이 현대 사회를 변화시킨 깊이와 범위에 대해서는 다각적으로 연구되었다. 이러한 기술의 출현에 19세기 유럽에서 발전한 과학인 음향학이 기여한 바를 살펴보면 의외로 미미하다. ---p.113
축음기는 에디슨의 다른 발명품처럼 시장성이 있다고 해서 발명에 이른 것이 아니라 다른 발명을 하다가 우연적으로 이르게 된 결과물이었다. 이 발명품에 대한 초기 반응도 전화기보다 실용성은 떨어진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소리를 녹음한다는 것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놓을지 에디슨 자신도 발명할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귀에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살지 누가 상상했겠는가? 음반 시장이 타이틀 하나로 수백만 장의 판매기록을 세우는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에디슨의 축음기 발명 과정은 1877년의 중계 전신기(relay telegraph) 발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동으로 전신을 받고 그것을 다시 전송하는 이 발명품의 핵심 장치는 전신 부호를 기록하는 회전 원반이었다. 이 밀랍을 먹인 종이 원반 위에는 철필이 움직이며 홈을 만들었고 그것을 뒤집어 돌리면 홈이 돌기로 바뀌면서 철필이 돌기를 다시 전기 신호로 바꿔주게 되어 있었다. 그는 이 장치에서 힌트를 얻어 박판을 이용해 소리를 재생하는 장치를 생각하게 되었다.---pp.132-133
20세기 초 유럽의 음향학은 19세기 동안 가장 앞서 나갔던 음향학의 실험 전통과 이론 전통이 융화되어 음향학이 물리학의 한 분야로서 확고한 지위를 굳혀나가는 과정을 거쳤다. 동시에 음악 음향학은 여전히 음악 교육에서 그 유용성을 계속 인정받으면서 음악을 위해 음향학을 연구하는 일이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음향학의 실용성을 새로운 측면에서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 유보트(U-boat)의 공격이 전쟁에서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자 이를 막아내기 위한 전략으로 유보트의 엔진 소리를 탐지해 위치를 알아내기 위한 도구로서 하이드로폰(hydrophone)이 널리 사용되었고 그 연구를 통해 음향학의 실용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스딕(ASDIC)이 고안되고 수중 음향학 분야는 군사 기술로서 그 가치를 크게 인정받게 된다. ---pp.143-144
메이어의 연구는 유럽의 과학 전통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그는 특히 헬름홀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는 그가 물리적 현상을 논의하면서 감각과 지각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는 소리와 빛이 감각과 지각을 통해 사람에게 인지되는 과정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감각의 주체로서 사람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점에서 그의 물리학 강의는 유럽에서 이루어진 물리학 강의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은 그가 음향학을 연구하면서도 소리의 인지적 측면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p.185
한 지역의 사람들이 다른 선진 지역의 과학을 도입할 때 가장 먼저 배워가는 것이 정보적 지식이다. 이 정보적 지식에는 경험 과학적 지식과 수학 공식화된 간단한 정보가 포함된다. 그다음은 실험을 재현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를 위해서는 실험 기구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초기에는 실험기구를 수입해 충당하는 방식을 취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실험 기구를 직접 제작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일반적으로 실험 기구를 자체 제작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데는 수십 년의 시간이 소요되며, 그동안 뛰어난 연구자는 수입된 기구를 사용하거나 그것을 개조하거나 조합해 독창적인 실험적 성과를 창출해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창조적 실험과 실험 기구의 자체 조달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경험 과학은 온전하게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수리 과학의 전파는 좀 더 느리게 일어난다. 단순 정보 수준의 수학적 지식을 넘어서서 고차원의 수학을 바탕으로 한 과학은 수학을 배우는 어려움으로 늦추어진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발전한 지역에서 만들어진 수학적 지식을 이해하는 데 치중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때로는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갖춘 이들이 심지어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책만을 보고 독학으로 제대로 된 이해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다. 그다음은 독창적인 수학적 이론을 창출하는 단계인데 이는 제대로 된 수학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된 수학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 이들이 모두 독창적인 수학적 이론을 창출해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수학의 이해라는 진입 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에 경험 과학의 전파에 비해 수학적 과학의 전파는 훨씬 지체되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독창적인 수학적 이론을 창출하는 단계로 나아갔을 때는 이미 실험 과학에서는 독창적인 업적이 한참 나온 뒤인 경우가 많다. ---pp.198-199
메이어는 유럽의 음향학 전통을 따르면서도 음향학 지식을 실용적 기술로 연결시키려는 욕구가 컸다는 점에서 유럽의 음향학자와는 차별화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음향학을 실용적 기술에 접목시키려는 메이어의 노력으로 특히 주목할 만한 업적이 토포폰의 발명이었다. 이 장치는 레이더가 출현하기 전인 제1차 세계대전 전후에 항공기의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 널리 사용된 다양한 음향 위치 추적 장치의 전신이었고, 수중에서는 잠수함의 위치를 찾아내는 하이드로폰에 적용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이 장치는 원래 안개 속에서 선박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안개 신호를 보낼 때 이 음원의 위치를 선박에서 정확하게 감지하기 위한 장치로 고안되었다. ---p.241
메이어의 음향학이 실용적 기술에 기여한 부분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에디슨과의 상호작용이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후 그것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메이어에게 받은 자문은 메이어의 전문 지식이 기술의 발전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부분이었다. 이는 메이어가 미국에서 뛰어난 음향학자로서 명성을 얻었음을 보여주고 당시 메이어가 추구하던 음향학의 성격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한편 메이어의 자문이 에디슨의 축음기 개선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축음기의 상용화에 당장 기여한 것은 아니었다. 축음기가 상용화되기 위해 해결해야 하는 기술적 문제는 전문적인 음향학 지식이 없이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그런 점에서 에디슨의 연구 개발 팀의 연구 노력은 과학적이기보다는 여전히 전통적인 기술의 방법을 채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메이어의 음향학과 에디슨의 축음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자리매김이 요구된다. ---p.245
18세기에 음향학은 기술보다는 예술의 목적에서 주로 추구되었다. 즉, 음악에서 악음의 이해를 통해 음계를 만들어내고 화음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악기를 개선하는 데 필요한 실제 지식을 얻었다. …… 19세기에 크게 달라진 양상은 과학적 동기 자체를 위해 음향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음향학이라는 과학 분야가 수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소리를 일으키는 진동과 소리를 운반하는 음파를 연구하는 것은 진동과 파동이라는 자연의 일반적인 측면을 이해하기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서 크게 관심을 끌었다. 소리를 이해함으로써 빛, 결정, 전기와 자기를 이해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것이 유럽의 맥락에서 19세기에 음향학이 전개된 양상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에 전래된 음향학은 전혀 다른 지적 환경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아 전개되었다. …… 미국의 음향학은 실용주의와 긴밀한 연관이 있었다. 실용적 가치를 중시하는 배경 속에서 음향학은 기술을 창출하기 위한 기초로서 관심을 끌었고 그러한 측면이 특히 강조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뫅생한 전화기와 축음기는 장치 개선을 끊임없이 요구받으면서 미국 음향학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리기 위한 실질적인 동기를 제공했다.
---pp.266-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