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질로(1946년부터 1954년까지 피카소의 동반자)에 따르면... 피카소는 "화상들의 방문에 대비해 그녀와 '작가와 화상 놀이'를 하곤 했다... 화상이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가지고 나와 간단한 '연극'을 했다. 파블로가 자신의 역할을 맡고 내가 화상 역할을 맡을 때도 있었고, 반대로 파블로가 화상이 되고 내가 파블로가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짧은 연극은 단순한 오락 차원이 아니었다. 피카소는 그것을 통해 화상들과의 거래를 위한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다소 우스꽝스러웠고, 종종 엉뚱한 방향으로 새기도 했지만, 우리가 주고받은 각각의 질문과 대답은 반드시 화상이 방문했을 때를 전제로 하고 생각한 것들이었다... 다음날 나는 중립적인 관찰자로 파블로가 화상을 만나는 자리에 합석했다. 그는 화상이 내가 전날 밤에 자기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대답을 할 때마다 내게 살짝 윙크를 보냈다. 파블로와 내가 했던 게임은 현실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저 재미 삼아 한 것이다. 물론 게임의 대부분은 파블로의 승리로 끝났다. 그는 재치와 상상력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나보다 한 수 앞서 있었기 때문에 늘 결정타를 날리곤 했다.
질로의 말대로 피카소는 단순한 오락의 차원에서 그런 놀이를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놀이'의 이면에 깔린 치밀한 계산은 가벼운 오락 정도와는 거리가 멀다.
작가 생활 전반에 걸쳐 피카소는 자신의 명성을 키워주고 자신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준 사람들, 즉 화상, 평론가, 수집가, 큐레이터들의 지지를 얻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1918년에는 화상을 '적'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작가로서의 권리와 독립성을 보장받는 유리한 조건을 놓고 폴 로젠버그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계산은 단순한 자기 홍보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피카소 한 작가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아방가르드 전통의 핵심이며, 그 전통 속에서 작가는 여전히 '사업가'다.
--- pp. 442∼443
오래 전에 피카소가 자기는 가난한 사람처럼 사는 부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이 바로 그의 성공 비결이었다. 피카소는 가난하게 살고 싶어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처럼 살고 싶어했다. 가난한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처럼 자유롭고 싶다는 뜻이다. 즉 앞날에 대한 걱정 없이 부유하게 살면서도 부자들이 겪어야 하는 사회적인 제약 따위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중략) 너저분한 작업실과 보헤미안 같은 삶을 상상하면서, 무질서하게 흩어진 그림 물감 튜브와 석고상들 속에 파묻혀 있는 위대한 예술가를 만나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카소는 아주 깔끔한 곤색 양복과 커프스가 달린 하얀 와이셔츠에 새틴 넥타이까지 매고, 파리의 부자 동네 라보에시 가에 있는 멋진 아파트에서 나를 맞이했다(표지 사진 참조). 그는 자신의 양복에 꽂혀 있는 장식핀만큼이나 산뜻한 아파트에서 중세의 영주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호화로운 가구들이 가득 찬 집안의 이곳저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 pp. 8~9
1914년 3월 2일, 서구의 미술계는 20세기 미술의 역사적인 성공을 기념하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대서양 양쪽의 작가, 평론가, 화상, 수집가, 그리고 큐레이터들은 파리의 초라한 시립 경매장 오텔 드루오에서'곰의 가죽(La Peau de l'Ours)'이라는 수집가 그룹의 소장품 경매가 엄청난 수익을 창출한 것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야수파와 입체파가 처음으로 자유 경쟁시장에서 테스트를 받았던 자리인 이날의 경매에서 낙찰된 145점의 작품은 대부분 20세기 작가들의 것이었다. 반 고흐와 고갱 등의 후기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을 시작으로, 피카소와 마티스의 초기 작품들을 중심으로 20세기 초반의 미술을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주옥 같은 작품들이 경매에 올랐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날 경매의 스타는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피카소의 장미 시대의 대표작 '곡예사 가족'이었다.
--- pp. 2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