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진행된 국어학은 국어 정립 문제와 관련하여 연구되었고, 근대 이후 형성된 ‘국어 의식’은 우리말에 대한 단순한 인식이 아닌 우리말의 발전 방향에 대한 논리, 즉 ‘국어 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어학 이론으로서의 ‘학설’과 국어 사상을 의식하며 형성된 국어학의 ‘논리’를 종합하여 근대 국어학사를 서술할 때, 근대 국어학의 전모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 p.17~18
그런데 국어교육, 국어정책, 국어운동 등과 관련한 연구가 광범위하게 진행된 만큼 이를 근대 국어학의 전개와 연관 지어 서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이러한 영역과의 관련성을 효과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위해 특별히 주목할 영역은 인물론 및 계보론이다. 국어학, 국어교육, 국어정책, 국어운동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발전해 온 근대 국어학의 특성을 고려하면, 국어학 연구자의 삶과 사상, 그리고 인물들 간의 영향 관계를 서술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들 영역과 국어학을 연결 지어 서술하는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 p.25
근대 국어학에 대한 연구가 문법서의 체계 및 문법 용어와 같은 미시적 항목을 나열하여 비교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당대의 문법에 대한 이해는 축자적逐字的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다. 이처럼 당대의 시대정신을 문법 연구와 관련지어 조망할 수 있는 문제의식이 결여되면, 국어를 의식하고 국어학을 모색한 맥락을 지나치거나 단순화하기 쉽다. --- p.53
근대 국어학은 완전한 언문일치를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을 시대적 사명으로 삼아 발전했다. 언문일치의 핵심은 구어를 문어화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국문 철자법을 구상하고 국어 문법서를 편찬하고 국어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진행해야 했다. --- p.75
전통의 계승을 강조하는 관점과 전통과의 단절을 전제하는 관점의 문제점은 전통 언어학의 계승이나 서구 언어학의 수용을 표면적 사실만을 근거로 판단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실학자들과 근대 국어학자들이 한글 연구를 했다는 표면적 사실만을 근거로 전통의 계승을 단정할 수 없고, 서구 문법서의 설명 방식과 근대 국어문법서의 설명 방식이 유사하다는 표면적 사실만을 근거로 서구 언어학의 수용을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대인의 의식과 당대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중심에 놓고 계승과 수용의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 p.115
국어 정립의 논리는 ① 갑오개혁 이후 근대 국민어 형성을 위한 이념적 기반이 만들어졌다가, ② 국가 주권이 위태로운 시대 상황에서 민족어 수호 논리로 전환되기 시작했고, ③ 한일병합 이후 민족어 수호 논리로 굳어졌다가, ④ 해방 이후 국어 재건 논리로 전환되었다. --- p.160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조선인들이 일본어 학습이 아니라 한글강습을 통해 문맹을 타파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이는 조선이 다른 식민지 국가에 비해 민족어 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진행된 근대 어문운동의 경험과 이 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조선어학회가 없었다면 민족어 운동이 이처럼 치밀하게 진행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식민지라는 한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조선총독부의 언어정책과 길항하면서 조선어 문화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동기를 끊임없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p.190
1930년대는 어문운동의 황금기였지만, 어문운동의 사상적 토대였던 어문민족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화한 시기이기도 하다. 어문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논리가 구체화되는 데는 1930년대 조선어학계에 일기 시작한 두 가지 흐름이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조선어학의 과학화를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구조주의, 역사비교언어학 등이 도입되면서 객관적 실체로서의 언어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진행되었다. 조선어연구가 과학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1930년대 중반 어문정리가 마무리되는 상황과 관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언어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이 이루어지면서 ‘세계의 반영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호 비판적이었던 두 흐름에서 공통적으로 문제 삼은 것은 관념적인 어문민족주의에 의거한 언어 연구와 어문정리 운동이었다. 이때 어문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논리는 ‘언어도구론’이었다. --- p.228~229
조선어학이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과정으로의 변화든, 조선어의 위상이 떨어지는 과정에서의 변화든, 조선어 연구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핵심은 과학적 연구 방법론에 대한 모색이 두드러진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조선어 연구에 과학적 연구 방법론이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1930년대 후반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정교하고 수준 높은 고어 연구가 나왔으며, 1942년에는 기념비적인 저서가 출간되었다. 이는 1940년대 들어 조선어 연구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말해 준다. --- p.280~281
마르크스주의 언어학의 실체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불분명한 실체를 밝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르크스주의 언어학의 문제의식은 근대 국어학의 전개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고, 남북이 이념의 대립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북한 국어학이 이념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언어의 이념성이라는 것이 불분명한 만큼 언어학의 이념성 또한 불분명할 수밖에 없지만, 해방 이후 국어학의 모색 과정에서 슬로건처럼 제기된 마르크스주의 언어학이기에 이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p.313
해방 이후 국어 재정립 활동은 ‘우리말 도로찾기’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국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초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이처럼 어문민족주의의 논리가 어문정책의 논리가 되는 상황에서 국수주의적 국어관을 경계하는 흐름이 형성되었고, 한자, 외래어, 학교문법 등과 관련한 문제는 양 진영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지점이었다. 규범사전과 규범문법의 제정이라는 근대 국어학의 과제를 완결 지어야 했던 국면에서 이러한 대립은 주도권 경쟁의 성격을 띠었다.
--- p.323
해방 이후 국어학 연구는 대학의 국어국문학과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급격하게 늘어난 대학의 수만큼 국어국문학과의 수도 증가했으며, 교수의 수요를 충당하는 과정에서 국어학 전공자의 수도 늘어났다. 따라서 해방 이후 국어학의 지향과 성과를 판단하는 데에는 각 국어국문학과의 학문적 지향점을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 p.363
해방 직후 전개된 국어 정립 활동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유보되었고, 1953년 이후에야 남북한 국어학계는 사전 편찬과 표준문법의 정립을 위한 논의를 재개할 수 있었다. 남한에서는 1957년 『큰 사전』이 완간되었고, 1963년 학교문법통일안이 마련된다. 북한의 경우에도 1960년 사전 편찬이 종결되고 1964년 표준문법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국어 규범화가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한국어의 범위와 특성을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 p.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