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반세기를 넘어서 부활한 라디오의 소리를 들었다. 2016년 봄날, ‘아버지의 라디오’에서 소리가 난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져서 달려갔다. 생산된 지 57년만에 낡은 기계가 다시 작동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지만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조심스레 손때 묻은 스위치를 켜자, 정말 기적처럼 붉은 전원등에 불빛이 들어왔다. 진공관이 예열되기를 기다리면서 15초 정도 지나니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다이얼을 돌리다보니 점점 또렷해지는 아나운서의 음성, 흥겨운 노랫소리까지! 아, 드디어 기억 속에 묻혀졌던 바로 그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손수 만든 ‘A-501’ 라디오가 세상을 향해 첫 발신을 하던 순간의 전율이 다가왔다. ---「엮은이 머리말 ‘아버지의 라디오’가 들려주는 이야기」중에서
어느 날 아버지가 가져다 놓은 라디오는 참 신기한 물건이었다. 앞면의 스위치를 돌리면 온 방안에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도대체 누가 그 소리를 내는지 궁금해서 나는 그 요술 상자 속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작은 요정 같은 것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곤 했다. 1978년 이화대학 약학과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밝은 빛으로 가득한 세상을 꿈꾸며 살았다. 그런데 졸업반이 되면서부터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열정이 서서히 나를 사로잡았다. 경동교회를 다니던 나는 박기평이라는 노동자를 만나게 되었다. 80년대 중반에 시집 『노동의 새벽』을 발표하고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로 널리 알려지게 된 그 청년을 사랑하게 된 나는 지식인의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자 편에 서야 한다는 시대의 당위를 받아들여서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로 작정했다. 참으로 순수하고 용감무쌍했던 나의 결단은 아버지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엮은이 머리말 ‘아버지의 라디오’가 들려주는 이야기」중에서
전깃불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벌써 골짜기를 한 바퀴 돌았는지 가까운 마을에서뿐 아니라 십리 이십리 밖에서도 모여든 산골 사람들이 초저녁부터 아예 마당에 멍석까지 깔고 앉아서 진을 치고 있었다. …… 드디어 저녁 8시, 나는 스위치를 가동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미리 알린 다음에 모든 전등에 한꺼번에 전기를 보냈다. 갑자기 온 집안과 제재소 안이 대낮 같이 밝아지자,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고 큰 소리를 지르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서로 손을 맞잡거나 부둥켜안고 마당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감격스러워하는 모습에 내가 오히려 놀랄 정도였다. 그날 청암골을 밝힌 불빛은 밤새도록 꺼질 줄을 몰랐고, 지리산의 산천초목도 짐승들도 새들도 모두 놀라서 깨어 있는 듯 했다. ---「첩첩산중에 최초로 밝힌 전깃불」중에서
1946년 하반기에 들어서자 좌우익 세력의 대립은 매우 전투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우익 청년단체인 ‘족청’은 ‘민청’에 미처 가입하지 못했던 청년들을 뒤늦게 끌어들여 만들어졌는데, 두 개의 청년 단체가 작은 마을 안에서 사사건건 자주 충돌을 일으켰다. 나는 처음부터 ‘민청’이었지만 고향에서 한 사람밖에 없는 기술자였으므로, 우익단체의 행사라고 해서 전기장치나 앰프시설을 안 해 주었다가는 무슨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입장이었다. …… 나는 “여러 동무들, 의사가 좌우익 환자를 가려서 치료할 수 없듯이 우리 고장에서 하나밖에 없는 전기 기술자인 내가 좌우익을 가려서 내 기술을 쓸 수는 없습니다. 나는 ‘전기 의사’이므로앞으로도 좌우익 어느 쪽이든 막론하고 나의 기술을 제공할 것이며, 경찰이나 군대에도 골고루 나의 기술을 제공할 것입니다” 라고 선언을 해버렸다. ---「좌우익을 넘나든 ‘전기 의사’」중에서
1958년 주요 일간신문의 광고란에 럭키화학공업사가 낸 ‘고급 기술 간부 모집’ 광고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 우리나라 전기분야의 주도적인 회사가 될 것임이 분명해 보였기에 나는 이력서를 제출하기로 결심했다. …… 마지막 시험문제라는 설명과 함께 김균 씨가 칠판에 써 내려간 문제는 “5 Tube, 2 Band(B,C/S,W)의 100V AC only 라디오의 회로도를 그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빙그레 웃었는데, 그것은 마치 고향 마을의 골목길을 그리라고 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부터 이미 일제 라디오를 수없이 다루었고, 미제 라디오 수천 대를 고쳐 본 나에게 그런 회로도쯤이야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는 것이었다. …… 내가 거침없이 회로도를 그려나가는 동안 시험 감독원 모두가 내 자리 뒤에 모여서 숨죽이며 감탄사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금성사 수석 합격과 라디오 개발」중에서
라디오 설계와 관련된 모든 일은 내가 주도해서 진행하게 되었는데, 약 1년 후인 1959년 8월에 금성 A-501의 시작품이 완성되어, 상공부 제4133호로 상표등록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15일에 국산 라디오의 출시가 이루어졌는데, 초기 생산량은 87대 정도였고 가격이 2만환이었다. 내가 금성사에서 받은 첫 월급이 6천환이었으니 결코 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그때 시중에서 3만3천환에 거래되던 미제 라디오에 비하면 훨씬 저렴한 편이었다. 당시 국제신보 1959년 11월 4일자에 “국산 라디오 등장”이란 제목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도되었다. “금성 A-501 국산 라디오는 기술 수준이 외국제품에 비해 손색이 없고 값
도 싸다. 우리나라의 전기사정을 고려해서 50볼트의 낮은 전압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며, 처음부터 국산 부품을 60%나 사용한 것은 기록될 만한 일이다.” ---「첫 국산 라디오 ‘A-501’의 탄생」중에서
그날따라 금성사에는 아무도 없었고 생산과장이었던 나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는데 …… 검은색 미제 승용차 한 대가 마당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그 차에서 세 사람의 군인이 먼저 내리고 곧 이어서 군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키 작은 장교가 한 사람 내렸다 …… “예고도 없이 미안합니다. 라디오 공장을 좀 보러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그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 양반이 요즘 매일같이 신문에 나오는 박정희 장군이 아닌가!…… 그날로부터 불과 일주일쯤 되던 날, 모든 신문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밀수품 근절에 관한 최고회의 포고령’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공보부가 주관해서 ‘전국의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는 발표가 잇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농어촌에 라디오를 보급함으로써 군사혁명에 대한 홍보와 지지세력 확대를 도모했던 박정희 장군의 의도와 우리나라 전자공업의 발전을 추구하던 시대의 요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던 게 아닌가 싶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극적인 만남」중에서
내 딸과 사위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나는 거실 한가운데 영광스럽게 걸어두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포장’을 거두어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기로 했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20세기 말에는 그 상장의 의미도 빛이 바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국 근대화의 주역’으로 산업현장에서 심혈을 바쳤던 우리 세대는 위대했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당했던 고통을 강요하거나 외면해온 죄를 짓기도 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민주화의 주역’이라는 임무를 떠넘기게 됨으로써 우리 사회가 더욱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유별난 딸과 사위 박노해」중에서
우리 아들들과 딸들이 온몸으로 부딪혀 이겨냈던 고난으로 인해서 지금은 우리나라도 민주국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지만, 아직도 보수 기득권에 안주하는 구세대의 영향력이 막강한 우리의 현실은 또 다른 고통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 세대를 향해 기립박수를 쳐줄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두고, 앞으로 그들이 감당해야 할 새로운 시대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가진 자들이 오만과 독선을 버리고, 힘 없는 이웃과 더불어 더 큰 희망과 꿈을 키워가는 기쁨을 깨닫게 하는 일일 터인데, 산전수전 다 겪어온 늙은 엔지니어의 눈에는 환하게 보이는, 이 진실의 전파를 수신하는 라디오를 설계할 만한 여력이 내게 남아 있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라디오 시대보다 소통의 기술이 훨씬 발달된 인터넷 세상을 경쾌한 걸음으로 누비고 다니는, 저 낯선 세대를 믿어도 좋을 것인가.
---「유별난 딸과 사위 박노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