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당시 사회에서 가정에 갇혀 있었던 만큼 '여성의 사생활' 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확실히 그리고 일반적으로 여성은 공적인 역할, 정치, 행정, 도시의 자치 기구, 동업조합 등 외부 세계의 책임에서 배제되었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16세기 리옹의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여성에게는 비공식적인 역할이, 그나마도 가혹하게 인정되었을 뿐 공식적인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가사를 돌보는 것이었으므로 가정이 여성의 활동 무대였다. 여성은 교회와 세속 사회가 부여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를 구형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겼다. 그것은 단정한 몸가짐, 가족에 대한 헌신, 좋은 평판의 유지 등으로 요약되는 이른바 명예에 대한 요구였다. 따라서 한지붕 밑에서 한솥밥을 먹는 모든 사람에게 헌신하는 것이 여성의 운명이었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양육하며 병자를 돌보고 임종을 지켜야 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그런 일에 헌신하는 것이 여성의 직분이었다. 여성이 실제로 생산에 참여했다고 할지라도 여성을 칭찬하고 그러한 사실을 유언장에 기록하는 것은 당시의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훗날 프랑스에 카르멜 회를 창설한 아카리 부인도 가정과 딸들에게 직분을 다했다. 그녀는 딸들을 엄격하게 교육시켰으며, '딸들을 교육시키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정다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 딸들을 하나씩 곁으로 불렀다. 그것이 주어진 역할이었던 만큼 그녀는 매순간 봉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올바크 남작의 장모였던 엔느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매년 여름 그랑발 성에서 자기 자식들 외에도 수많은 손님들을 맞아들였다. 그 집은 상당히 컸다. 1760년대에 그 집의 단골 손님이던 디드로는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쓰던 안주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요리에 관심을 보이면 다음날 그 요리가 제공될 정도였다. 사람들은 매사에 그와 같은 방식으로 대접받았다.”
결국 여성은 하녀인 동시에 안주인이었다. 실제로 여성은 가장으로부터 가사를 돌보는 데에 필요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대신 가장은 여성에게 겸양과 헌신 그리고 근면을 요구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여성을 가장에게 철저히 종속된 존재로 간주하는 시각은 재고되어야 한다.
--- pp.535~536
귀족 작위도 사회적 지위도 없는 가정의 경우 폭력, 구타, 도둑질, 배신, 사기 등에 관련된 싸움에서 명예를 내세우는 것은 일종의 존재 방식이자 타인의 말에 맞서 싸우는 수단이었다. 가족의 고발과 뒤이은 경찰 조사에 따른 감금은 가정적인 결함으로 인해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르는 참을 수 없는 공개성, 즉 이웃의 쑥덕거림과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만약 왕이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고 사적으로 비밀리에 말썽꾸러기를 감금시킨다면 명예는 더이상 손상되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가정의 수치도 감옥의 어둠 속에 숨겨졌다. 바깥으로 드러날 수도 있엇던 불명예가 갑작스럽게 숨겨짐으로써 가정은 순수함을 회복하고 아무 흠도 없는 공적인 외양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런 수단을 통해 가정은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 사이의 불가피한 혼합 땜문에 감출 수 없었던 부분을 숨겼다. 가정은 비밀과 어느 정도의 내밀성을 지키기 위해 군주권에 가장 절대적인 성격을 부여한, 가장 전제적인 국왕의 제도에 의존했던 셈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과정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민중층의 가정에 도움이 되었다는 놀라운 모순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우선 민중층이 귀족 및 부르주아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신민임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또한 품위를 손상시키는 재판의 낙인을 모면하고 명예를 회복함으로써 치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 pp.760
감정의 분리는 사적인 개인을 공적인 열정에서 떼어놓는 결과를 낳았으나, 그의 사적 영역 안에서만큼은 사적인 개인을 일종의 국가 이성과 같은 최고의 존재로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18세기 동안 이런 구분은 더이상 사적인 개인에게 만족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인간의 정신과 마음 모두가 그런 구분으로 인해 피해를입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조국을 위해 자유롭고 신중하게 헌신할 수 있는 영광스런 기회가 부당하게도 시민에게는 차단되었고, 정치적인 기획에 따라 추진되었던 가정의 발전은 거창하게 계획했던 대로 영역을 확대시키기는 커녕 정반대로 사적인 감수성의 자연스런 만개를 억압했던 것이다.
앙시앵 레짐 말기에 튀르고는 사회의 풍속이 '일반 사회'를 향해 떠내려가고 있다고 개탄했는데, 이 때 그는 가정적인 감정이 고갈되었음을 통탄한 젊은 페루 여인에게 공감을 표시했다. 교양 있는 아니면 사교적인 대화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여자와 어린이들에 대한 연민과 관대함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자와 어린이는 그들이 속해 있는 평범한 수준을 넘어선, 좀더 중요한 문제가 논의되는 자리에서 배제되었다. 사람들은 여자와 어린이에게 적어도 그들이 받아 마땅한 세심한 배려조차 베풀지 않았다. 가정에서의 보살핌은 시대에 뒤떨어진, 다시 말하면 해로운 것처럼 여겨졌다. 어린이 교육은 하인들에게 맡겨졌으며 사람들은 그들이 그러한 의무에 충실하다고 믿고 싶어했다.
청소년은 훗날 그 교육적 기능이 문제시된 수도원이나 콜레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돈으로 고용된 교사들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으며 성장한 젊은이들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사회에 진출했다. 사회는 이제 활기와 개방성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가정 안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을 실격시킬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가정교육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다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사적인 개인들' 로 하여금 집 안에서의 안락함만을 추구하며 필요한 관계에만 집착하게 만들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 pp.9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