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숲에 묵었던 안개가 아침 햇살에 불려간다. 산새 한 마리가 울어 시간을 깨우고 안개를 털어내는 나무와 풀들로 우주는 비로소 뜻을 가지기 시작했다. 산사의 맑은 방에서 잠을 자고 빈손으로 일어나 뜻 깊은 우주를 본다. 알 길 없는 우주에서 삶이란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먼 길을 왔어도 길은 없고, 길이 없이도 마음은 틈만 나면 어딘가를, 어딘가를 다녀온다.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산새의 날개에 또 하루가 달렸다. --- p.12
꽃 피는 담장 뒤에서 누가 울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터지는 입 틀어막고 넘치는 눈물 문질러가며 담장 뒤에 앉아 우는 사람이 지금도 있을지 모른다. 꽃이 필 땐 꽃만 보인다. 담장 뒤에서 누가 울어도 모른다. 산꼭대기 새가 우는 건 알아도 꽃 피는 삼월에 우는 사람이 있는 건 아무도 모른다. 산꼭대기 새도 아는 걸 아무도 모른다. --- p.13
마음은 깊은 곳에 있었으면 좋겠고, 마음 깊은 곳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눈빛은 늘 아침 같았으면 좋겠고,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부는 많이 안 됐어도 게으르지만 않았으면 좋겠고, 할 수 없이 내는 말은 흙이 내는 풀잎 같았으면 좋겠다. 생각은 등불 같았으면 좋겠고, 오늘 생각이 어제 생각보단 밝았으면 좋겠다. 어쩌다 흐르는 눈물은 그 무엇보다 뜨거웠으면 좋겠고, 어쩌다 품은 용기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날이 저물어도 급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침이 와도 당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늘 독백으로 가슴이 뛰었으면 좋겠고, 힘든 고백 뒤엔 부처님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는 게 힘들어도 ‘나’는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는 힘들어도 나의 ‘자리’는 변함없었으면 좋겠다. 잠든 모습은 절 마당 같았으면 좋겠고, 지나간 하루는 절 마당을 지나간 나무 그림자 같았으면 좋겠다. --- p.18
연못 위에 낙엽이 쌓이고 있었다. 상왕산 개심사. 가을을 보러 온 사람들이 연못을 지날 때마다 낙엽들 사이로 파란 하늘이 내려와 잠겼다. 떨어진 낙엽 위엔 앙상해진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고, 멀리서 울던 산새는 가지를 옮겨 앉았다. 가을엔 자연도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연못에 떨어진 낙엽은 떠나온 가지를 볼 수 있었고, 가지를 옮겨 앉은 산새의 눈엔 떠나온 숲이 보였다. 자연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 있었다. 어느 해 가을, 개심사 연못은 시를 써낸 눈동자처럼 깊었고, 쌓이는 낙엽 사이로 하늘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도 자신을 바라보는 가을. 우리도 이 가을, 한 번쯤은 우리를 진지하게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 p.29쪽
절, 중생과 부처 사이에 있는 절. 나는 한 달에 두어 번 절에 간다. 대부분 오래된 산사에 간다. 불교계 신문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사의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으러 간다. 그렇게 산사에 머물면서 사진을 찍고 있으면 그 오래된 풍경들이 문명의 공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우수를 맛볼 수 있는 시간을 준다. 그 깊은 우수는 다름 아닌 ‘나’라는 걸 산사에 다니면서 알게 됐다. 삶이 힘들면 힘들수록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나.’ 그런 나를 산사에 가면 조금씩이라도 볼 수가 있다. 오래된 풍경 속에는 그런 힘이 있다. 그리고 이제 그 오래된 풍경이 나에겐 종교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나를 생각게 하는 그 무엇, 그것이 각자의 종교가 아닐까 생각한다. --- p.76쪽
책을 덮고 나니 그 시절이 떠올랐다. 책을 버리던 시절. 책이 아직 그 시절을 쥐고 있었다. 세월은 사라졌지만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는 한 ‘시절’은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마흔여섯의 어느 가을밤에 읽은 책 한 권은 열 줄의 글을 쓰게 했다. 그리고 그 책 속에는 잊지 못할 작은 제목이 있었다. 한 장 한 장 읽어가야 하는 책은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인생과 닮았다. 한 권의 책이 있기까지 작은 제목들이 있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작은 제목들이 있다. 그 제목은 사라지지 않는 시절 앞에 붙어 있다. 버려진 책 속에, 다시 주워온 책 속에 그 시절의 제목이 있었다. --- p.83쪽
초등학교 5학년 1학기가 끝나는 여름방학식 날이었다. 종례 시간에 선생님은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며 성적표를 나눠주었다. 나의 성적표엔 ‘수’가 없었다. ‘우’ 몇 개와 ‘미’ 몇 개, 그리고 없던 ‘양’도 하나 보였다. 그동안의 성적표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그날의 성적은 너무 초라했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왠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식에게 부모란 돌아서 갈 수 없는, 어떤 ‘길목’ 같다. 존재 자체가 들고 있는 회초리인 것이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너무나 무거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민’이란 걸 했던 것 같다. --- p.85쪽
어두운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막이 어둠의 순도를 높여갔다. 짙어가는 어둠과 함께 두려움도 배가 됐다. 정막을 깨뜨리며 칼바람이 지나가면 그 뒤를 마른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며 쫓아갔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낙엽들의 그 가벼운 음향이 나를 떨게 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그 작은 소리에 쉰 살을 바라보는 남자가 무서워서 떨다니. 나는 움츠러들며 나의 뒤로, 또 나의 뒤로 숨고 또 숨었다. 나는 무서워서 어린아이처럼 덜덜 떨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길이, 아무도 없는 세상에 혼자 서 있는 것이, 무서웠다. 사나운 짐승, 나쁜 사람 그리고 세상에 없다고 믿었던 것들이 모두 그 두려움 위로 출몰했다. 낙엽 위를 걷는 나의 발소리조차 무서웠다. 한없이 우스워져가는 나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잠자리에 오줌을 싸고 아침에 일어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아이처럼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어이없는 ‘나’는 사실이었다. 어둠은 나에게 나의 액면을 보게 했다. 어둠은 모든 것을 지웠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것들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어둠은 밖으로, 밖으로 향하는 모든 존재들의 시선을 안으로,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유한의 존재들이 ‘시간’에 무릎을 꿇듯, 어둠 속에 서 있는 모든 존재들은 ‘어둠’이라는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 p.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