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69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신화나 설화 따위의 옛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속초에서 평범한 유년기를 마치고 1988년 서강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해 그곳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서강대학교에서의 학부와 대학원 시절 근대 유럽의 형성과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서로 다른 별개의 주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관심은 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공부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전인적 교양인을 강조했던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빠르게 진보하는 물질 만능의 대규모 정보 사회인 현대사회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면, 여기에서 배태된 새로운 관념들은 그가 현대 유럽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우리에게 먼, 그것도 우리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이탈리아 인들의 역사에 그가 관심을 가지는 진정한 소이는 바로 성찰과 비판 그리고 그것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부르크하르트가 이야기했듯이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인들이 '근대 유럽의 첫 아이' 로 불릴 수 있다면, 당시 발생하고 융성했던 문화는 고전고대의 인문학적 전통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문제 의식에서 그는 'L. 브루니의 공화주의' 라는 제목으로 르네상스의 대표적 휴머니스트였던 레오나르도 브루니의 정치 사상에 관하여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특히 이 논문에서 그는 근대 서양 정치 사상의 한 가지 원류인 공화주의 이념의 이론적 원천을 르네상스 시민적 휴머니즘에서 발견함으로써, 르네상스의 근대적 성격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 책은 르네상스 시민적 휴머니즘에 대한 그의 지속된 관심의 결과이다.
그는 지금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사학과에서 또 다른 르네상스 휴머니스트 포지오 브라치올리니의 휴머니즘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수사학과 철학이라는 서양 지성사의 두 축이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충돌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융화를 시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그가 의도하는 바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자아' 와 '타아'에 대한 관념이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고찰함으로써,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그의 진정한 목적이다.
브루니는 피렌체 아레쪼의 부유한 곡물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물이 되기 전에 부모의 잇따른 죽음으로 경제적으로 곤궁해진 그는 법률가가 되기를 꿈꾸며 이십대 초반 피렌체로 유학간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휴머니스트였던 살루타티와의 만남과 젊은 휴머니스트들과의 교류로 인해 고전학과 인문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지적 변화는 당시 토스카나 제일의 교육도시이자 라틴 문학의 중심지로 유명한 고향 아레쪼에서 받은 유년 시절의 인문 교육이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살루타티는 그를 로마사와 로마 문학의 길로 인도했으며 그가 그리스어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주선했다. 이러한 배려와 교류로 브루니는 해박한 고전 지식과 뛰어난 고전어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서른 다섯에 법률 공부를 완전히 접고 로마에 가서 교황청 비서가 되어 여러 교황을 위해 봉직했고, 이때 목격한 교회의 타락과 분열상은 훗날 그의 사상이 세속적인 경향을 띠게끔 했다. 9년후 그는 피렌체로 돌아가 문필가와 번역가로 활동하여 명성을 얻었다. 당시 대내적으로는 계급 갈등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과 대외적으로는 국가간의 정치적 팽창주의로 인한 전쟁을 겪는 등 격동기에 있던 피렌체에서 그는, 글을 통해 시민의 자유롭고 헌신적인 공동체로의 참여를 강조하고 공화정을 옹호하는 시민적 휴머니즘을 주창했다. 이는 내적으로는 피렌체인을 결집시켰으며, 외적으로는 피렌체의 대외정책을 정당화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제시한 시민적 휴머니즘은 집단의 일원으로만 인식되었던 중세적 인간관을 탈피하여 정치적 자율성을 부여한 근대적 시민상을 제시했고, 윤리적, 도덕적 기준으로만 평가되던 정치의 세속화를 촉진했으며, 근대 서양 공화주의 사상의 이념적 원천이 되었다.
주요 저작으로『새로운 키케로』『군사론』『난니 스트로찌를 위한 추도사』『피렌체 시민사』등과 그리스어 고전 번역서, 이탈리아어로 쓴 전기 작품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