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인 루이스ㆍ프로이스(1532~1597)라는 선교사가 1562년경 일본에 왔다. 그는처음에 기타규슈(北九州)지방을 중심으로 주로 전도하였으나, 1569년경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로부터 교토거주를 허가받고 1586년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서 환대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1562년부터 1597년 죽을 때까지 약 35년 동안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과 유럽의 생활습관이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 차이점에 대해 항목별로 상세하게 지적한『일구문화비교』(1585년)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16세기경의 일본국ㆍ일본인이 서양인의 눈에 어떻게 비쳤던가를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간혹 현대 일본인의 입장에서 볼때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들도 기술되어 있어 당혹함을 금치 못하는 부분도 없지 않으나, 오늘날 현대 일본문화의 그 잊혀진 모습들을 이해하는 길잡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일구문화비교』라는 책에 의하면 프로이스는 일본의 습관을 한마디로 아주 특이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하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일본 여성은 처녀의 순결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또 그것을 상실했다고 해서 명예를 잃지도 않거니와 결혼에 지장을 받지도 않는다.
② 혼인문제에 있어, 유럽에서는 부인과 이혼하는 것이 최대의 불명예이나, 일본에선 마음먹은대로 언제든지 이혼하며 그런 사실에 의해 부인은 명예를 잃지도 않을 뿐더러 또 다시 결혼을 할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종종 부인쪽에서 이혼을 요구하기도 한다.
③ 일본에서는 처녀들이 부모에게 말도 없이 하루 또는 며칠이라도 혼자서 가고 싶은 곳에 외출하기도 하며, 부인들도 남편에게 알리지도 않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자유를 가지고 있다.
④ 유럽에서는 애기를 낙태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없을 정도이나, 일본에서는 낙태가 매우 일상적인 일로서 20번이나 낙태한 적이 있는 여성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갓난아기를 키울 형편이 안되면, 모두 목에 발을 얹어 밟아 죽였다.
⑤ 일본에서는 비구니가 있는 절은 대부분 매춘부의 고을이 된다.
⑥ 명예와 권위를 유럽인은 턱수염으로 표현하나, 일본인은 뒷머리에 묶은 작은 상투(죤마게)로서 표시한다.
⑦ 재산관리의 경우, 유럽에서는 부부공유이지만 일본에서는 남편ㆍ부인은 각자 자기 몫을 소유하고 있으며 때로는 부인이 남편에게 고리로 대부하기도 하였다.
⑧ 목욕습관의 경우, 유럽인들은 남의 눈을 피해 집안에서 목욕하나 일본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스님도 공중 목욕탕에서 함께 목욕하며 특히 밤에 목욕하는 습관이 있다.
⑨ 유럽의 남자아이는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나, 일본에서는 15세가 될 때까지는 계속 기르는 습관이 있다.
⑩ 유럽에서는 여성들이 문자를 거의 쓰고 읽을 수 없지만 일본의 신분 높은 여성들은 문자를 알지 못하면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여 상당히 문학적 소양이 높은 사람이 많다.
⑪ 유럽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신부ㆍ선교사가 국왕ㆍ영주의 전령으로 파견되거나 이용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스님을 전령이나 전쟁의 무략(武略)으로서 이용하는 일이 매우 많다.
⑫ 유럽인들은 유일신인 예수를 믿는 일신교인 그리스도 교도로서 신앙ㆍ세례ㆍ종파가 동일하나, 일본은 13개의 종파가 있으며 거의 대부분이 예배 등의 방식에 있어 일치하지 않는다.
⑬ 유럽인들은 인쇄술이 매우 뛰어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거의 대부분 서사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인쇄술이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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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의 연기종목은 크게역사저인 사건을 다룬 것과 그 당대의 현실적인 사건을 다룬 것으로 나뉘어진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실을 다루는 것은 아니며, 그 내용도 아주 제멋대로이다. 줄거리가 있는 듯 없는 듯 기상천외한 줄거리를 보여주거나, 마지막에 가서 관객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결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처음 보는 사람을 다시 한번 놀라게 하는 것은 남자가 완벽하게 여자역할을 해내는 온나가타(女方)의 등장이다. 온나가타는 원래 국가의 억압 아래 불가피하게 생겨나게 된 것으로, 여성이 등장하는 가부키가 풍기문란을 가져온다고 하여 당국의 폐지명령을 받아 그로부터 100여 년 동안 남자가 여자 역할을 맡아 왔다. 늙은 배우가 온나가타로 등장할 때는 징그러울 정도이지만,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는 독특한 전통예술임을 깨닫게 해주는 측면도 존재한다.
일본의 고전예능은 거의 일정한 형태를 고스란히 지켜온 예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가부키의 경우는 '형의 예술'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형태 또는 양식미에 충실하여 언어와 모든 동작이 일정한 형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것은 양식 또는 형식이 내용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가부키의 지나친 양식은 온나가타의 존재에서 온 것으로서, 여배우가 무대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면서부터 생겨난 온나가타는 남자를 여자답게 보이기 위한 연극적 변형을 사용한 것이다.
예를 들면 온나가타는 무대에서 남자배우보다 앞으로 나와서는 안되는 것도 실은 원근법을 이용해서 조금이라도 적게 보이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그리고 소맷부리 밖으로 손목을 내밀지 않는다든가, 무릎을 떼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도 현실의 여자흉내라기 보다는 여자답게 보이기 위한 기교였다. 일본 여성의 안짱다리 걸음도 그렇다. 유명한 온나가타로 활약한 나카무라 토미주로가 처음으로 무대에서 이 걸음을 사용했을 때, 너무나 여자답고 나긋나긋한 자태 때문에 일반 가정주부들도 홀딱 반해 이것을 흉내내었다고 한다. 온나가타가 그 양식을 완성해감에 따라 남자배우도 그저 남자답게 거동해 보이는 것만으로는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리하여 가부키의 양식미에 대한 추구가 뜨거워졌다. 너무 형을 강조하다보니 구태의연한 모습을 못 벗어나기도 하지만 전통을 이어간다는 뜻에서는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가부키 배우를 에도시대에는 야쿠샤라고 일컬었다. 야쿠샤란 원래 고대시대의 신불에 관한 일을 맡는 자를 뜻했다. 그것이 점차 유희를 통해 신에 봉사하는 자를 가리키게 되었다. 노 야쿠샤ㆍ가부키 야쿠샤라고 칭했는데 에도시대에는 특히 가부키 배우를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야쿠샤란 말 대신 배우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옛날부터 배우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아 사농공상의 계층에도 들지 못하는 천민으로서 멸시를 받았으며, 거주하는 곳도 일반 사회에서 격리되고 외출 시에는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만 했다. 덴보개혁 당시 관가의 호출을 받은 배우들은 한 마리ㆍ두마리라고 불리며 가축과 같은 취급을 당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타인 명의로 별장을 짓기도 하였으며, 인기배우 같은 경우에는 연간 이천 오륙뱅 냥이나 받으면서 상당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연간 오백 냥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정부의 경고가 나왔을 정도라고 한다. 배우의 이런 사회적 지위는 메이지시대가 되어 신분제도가 페지되면서 비로소 향상되었다.
한편 배우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연기양식을 형(形)으로 전승하고, 거기에서 장인다운 예술적 경지를 연마해 갔다. 누구 누구의 예(藝), 즉 명배우가 창출한 형을 전승해감으로서 그것이 자기 가문의 예술 형태가 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가부키 십팔번'은 이치가와 단주로 가문의 가예이고, 괴담거리ㆍ세태거리는 기쿠고로 가문의 가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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