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의 철학 체계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으로 나뉘는데, 마르크스는 헤겔처럼 변증법을 역사에 적용하지만 그 변화의 동인을 절대 정신이라는 관념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 주체의 구체적 실천과 그 산물인 경제적 생산력에서 발견한다. 관념론의 주장처럼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회적)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유물론이라는 점에서 관념론과 대비되고, 인간의 실천을 중심 개념으로 하는 철학이라는 점에서는 데카르트이래 계속 확장되어 온 이성 중심 철학의 한 정점에 이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역시 헤겔 비판에서 출발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에는 절대 정신 같은 절대적 조정자가 없고 끊임없는 다툼과 불화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사물 자체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주관적 표상을 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계전체는 우리들의 표상일 뿐이며 세계는 인간의 주관에 의존하는데, 이런 세계의 본질은 의지이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의지가 모든 것의 근우너인데 이 의지는 맹목적이고 단지 괴로움을 줄뿐이다. 따라서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의지가 부정되는 무욕구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다.
니체는 마르크스와 쇼펜하우어 등의 헤겔 철학 비판에서 더 나아가 근대 서양철학 전체를 비판하는 철학을 전개하였다. 니체는 자신의 책『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등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듯이 전통적 형이상학에 종말을 고하고 니힐리즘 시대의 도래를 진단했다. 그는 절대적 가치나 목표가 사라진 시대에는 자신의 내적인 힘을 강화하려는 정신력인 힘의 의지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여 '초인'의 이상을 향하여 노력할 것을 주장한다. 니체에 따르면 삶의 가치나 의미를 좌우하는 것은 현실을 지배하고 작동시키는 권력이기 때문에 이런 힘 혹은 권력으로의 의지가 핵심 개념이다. 니체는 이 개념을 중심으로 기존의 서양 형이상학의 전환점을 마련함과 동시에 가치의 상대화 도입하여 비판철학으로서의 '계보학'을 제시하였다. 니체의 철학은 다양한 현대 철학 및 문화이론의 원천이 되었다.
--- pp.177~178
로마인 타키투스는 점차로 로마제국의 위협이 되고 있는 게르만족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서「게르마니아」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역사적으로 최초의 독일에 관한 책으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은 로마인들의 '독일인 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게르만족이 사는 지역을 일컬어 게르마니아라고 했는데, 이 말은 로마인들이 독일어를 사용하던 북쪽의 작센, 프리잰, 서쪽의 프랑크, 중부 독일의 튀링엔, 남쪽의 알레만과 바이레른 종족이 거주하던 라인강, 엘베강, 도나우강 사이의 지역을 총망라하여 지칭했다. 게르만이란 '로마적이지 않은', '민중적인'등을 뜻하는 말로서 로마인과 차별하는 지칭이었다. 본래 게르만족의 터전은 스웨덴 남부, 덴마크, 슐레스비히 - 홀스 타인 등(제2강 지도 참조)으로 추정된다. 1세기 초 이주와 경작이 이루어지면서 북게르만, 동게르만, 서게르만의 세 분류로 갈라진다. 북게르만은 처음의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그대로 머물렀고 동게르만은 오더르강을 건너 남쪽으로, 그리고 서게르만은 남부독일과 서부독일, 영국 인근 섬으로 이주했다.
가족제도는 엄격한 가부장주의적인 일부일처로 이혼이 금지되어 이혼할 경우 처벌당했다. 남자는 집을 짓거나 수렵에 종사했으며, 전쟁이 나면 싸우러 나갔다. 여자는 밭을 일구거나 자녀교육, 가축 사육 등을 맡았다.
씨족으 지도체제는 최고 고령자를 씨족장으로 추대했으며, 여자는 결혼하면 남자 씨족에 소속되었다. 씨족이 모여 부족을 이루는데, 우두머리는 제후였다. 부족의 큰 일은 “팅”이라는 민회에서 결정되었는데 자유민의 성년 남자가 이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이 자유민의 청년들은 중세의 기사와 비교될 수 있다. 초기 게르만의 신분구분은 자유민/반자유민/노예의 세분류였다. 후에 귀족은 자유민으로 전이되었다. 왕과 같은 지도체제가 생겨난 것은 부족 및 민족의 이동기에서였다.
경제적으로 게르만족은 처음 농경에서 출발했다. 처음에 밀, 보리를 경작했으며, 나중에는 귀리, 기장 등이 추가된다. 로마인과 접촉을 통해서 포도 등의 과일경작을 배우는데,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가축의 사육이다. 이미 석기시대부터 오늘날에 볼 수 있는 가축 전체를 거의 다 볼 수 있다. 교역과 교통은 일찍부터 발달하였고 이를 통해 해안지대와 섬에 정착할 수 있었다.
--- pp.87~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