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게도, 삶을 즐기는 데 좋은 시기와 자식을 낳아 기르는 데 좋은 시기는 겹친다. 초조에서 폐경까지의 가임기는 길지만, 임신의 적기는 대략 16세부터 스무 해 남짓한 기간이다. 이 기간에 여성들은 삶을 즐기거나 즐기기 위한 준비에 바쁘다. 산모의 평균 초산 연령이 28세를 넘겼다는 사실이 가리키듯,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임신의 최적기에 결혼하는 여성들은 이미 소수이고 점점 줄어들고 있다. [……]
물론 아이를 가진 여성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중요하다. 특히 충분한 유급 출산 휴가, 육아 비용의 보조, 탁아 시설의 확충, 6세 미만 자녀를 가진 근로자들의 ‘탄력적 근무 시간’과 같은 조치들은 당장 시급하다. 그러나 그런 경제적 지원은 출산의 유도보다는 임신과 육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어야 옳다. 태아와 유아의 환경을 보다 낫게 만드는 일보다 더 중요한 투자는 없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특권 계층이 있다면, 그것은 가임기 여성일 터이다.
이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의 맥락을 한껏 넓혀야 한다. 어떤 현상이 생물적·문화적 수준에서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면, 사회 정책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만으로는 제대로 살피기 어렵다. --- p.55~57
이런 상황에서 남성들은 자기 아내들이 자신들의 자식들만을 낳도록 하기 위해서 여성 족외혼을 선호했을 터이고, 여성들은 높은 ‘남성 부모 투자MPI’를 얻기 위해 여성 족외혼에 동의했을 터이다. 여성들로선 남성 족외혼의 여러 이점들보다 여성 족외혼에서야 가능한 높은 MPI가 더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즉 여성 족외혼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이로운 제도였다.
여성 족외혼은 여성들이 동의했으므로 생겨나고 이어질 수 있었으리라는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런 사정이 대부분의 여성들이 급진적 여성운동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까닭일 것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끼거나 의식적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여성 족외혼에 바탕을 둔 전통적 가족 체계가 자신들에게 다른 어떤 구도보다도 큰 혜택을 준다는 것을, 그리고 급진적 여성운동이 가족 제도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
모든 여성들의 궁극적 목표는 배우자들의 MPI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권리와 복지를 늘리려 애쓰는 이들은 MPI를 격려하는 기구들과 정책들을 도입해야 한다. MPI가 부족한 가족들이 사회적 지원을 받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특권을 누릴 계층이 있다면, 그것은 가임기의 여성들일 터이다. 그리고 임신했거나 수유하는 여성들에 대한 지원보다 효율이 높은 사회적 투자는 없다. 태아들이 좋고 안정적인 환경을 누리도록 하는 일은 특히 중요하다. 사람의 운명은 실질적으로 어머니의 뱃속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특권엔 나름의 책무가 따른다. 윌리엄스의 통찰대로, 여성과 남성의 자식들에 대한 투자는 나름으로 균형을 이루게 마련이다. 그런 균형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산술적 동등을 기계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여성이 누려야 할 특권을 근본적 수준에서 해친다. --- p.74~75/84
사정이 그러하므로, ‘단일 민족’이란 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순수한 핏줄’이란 개념을 숭상하는 것은 이론적 근거가 무척 약하고 현실적으로 모두에게 해롭다.
민족이 내구적 단위라는 생각도 그르다. 민족에 가장 가까운 생물학적 단위는 개체들의 모임인 개체군population인데, 위에서 살핀 것처럼, 개체군은 아주 연약하고 안팎으로 끊임없이 바뀌는 집단이다. 따라서 민족을 단단하고 불변적이며 내구적인 단위로 여기는 민족주의는 언뜻 보기보다 근거가 튼실하지 못하다.
그렇게 부실한 주장이 힘을 얻어서 중요한 사회적 이념과 기준으로 쓰이면, 어쩔 수 없이 갖가지 폐해들이 나오게 된다. 그런 폐해들 가운데 지금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민족에 대한 그른 생각이 우리 사회의 진화를 방해한다는 사실이다. 환경이 빠르게 바뀌므로, 현대의 모든 사회들은 끊임없이 적응하면서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민족이 단단하고 불변적이며 내구적인 단위라는 생각과 우리 민족이 ‘단일 민족’이라는 생각이 결합하면, 아주 배타적이고 과거지향적인 사조가 필연적으로 사회를 덮는다. --- p.119~120
진화는 목적론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방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진화는 진보를 함축한다. 진화가 보이는 진보적 추세들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중심적인 것은 정보처리 능력의 향상이다. 이 세상에 대한 정보들을 얻는 감각 기관들의 발달과 그 정보들을 처리하는 신경계의 발달은 이런 진보적 추세에서 두드러진 사건들이었다. 특히 뇌의 출현은 혁명적이었으니, 그것은 문화의 출현을 필연적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유전자-밈 공진화를 낳았다.
이 모든 진보적 현상들에서 중심적 존재는 개체들이었다.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단위라는 사실은 개체들을 진화의 중심적 존재들로 만들었다. 그리고 뇌의 출현은 개체들의 정보처리 능력에 혁명을 일으켰다. 자연히, 개체들이 지닌 엄청난 정보처리 능력은 진화에서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원래 유전자들의 ‘생존 기계’와 ‘수레’로 나타난 개체들은 이제 스스로 결정하는 독립적 존재들이 되었다.
개인들에게 자유를 한껏 보장하는 것이 옳다는 자유주의 이념은 이런 진화적 사실들에서 튼튼한 철학적 토대를 발견한다. 진화론이 발전된 모습을 갖추기 훨씬 전에 자유주의 철학자들이 뒤에 진화생물학이 증명할 이론들에 바탕을 두고 이념을 정립했다는 사실은 감탄스럽다. 이제 자유주의자들은 진화생물학의 성과를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이념을 다듬어야 할 것이다. --- p.175~76
과학소설은 본질적으로 현대 문명의 발전에 대해 문학이 보인 반응이다. 문학이 그것을 낳은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므로, 과학과 기술이 현대 사회에 미친 혁명적 영향은 당연히 현대 문학에 뚜렷이 반영되었다. 이 얘기는 물론 예술의 다른 분야들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얘기해서, 문학은 과학과 기술이 현대 사회의 결정적 동인으로 등장한 상황에 대해서 다른 예술 분야들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
과학소설의 이런 기능에는 ‘개념적 돌파conceptual breakthrough’가 필연적으로 따른다. 개념적 돌파는 패러다임(과학철학에서 쓰이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변화를 통해서 세상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실제로 거의 모든 과학소설 작품들은, 크든 작든, 개념적 돌파를 포함한다. 개념적 돌파는 작품 안에서 일어나는 것만이 아니며, 적잖은 작가들이 독자들 마음에서 그것이 일어나도록 작품을 구성한다. 개념적 돌파는 물론 과학소설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그것은 분명히 과학소설의 가장 중요한 특질들 가운데 하나이다.
--- p.27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