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신화와 태양을 사랑한 고대 그리스인의 생활
화려한 연회를 자주 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걸 중요시했기 때문에 화려한 연회를 자주 베풀었다. 연회의 참석자들은 주로 남성이었으며, 음식 시중을 드는 하녀나 고급 창녀인 헤타이라Hetaira, 여성 악사를 제외한 여성들은 부인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를 취했으며, 포크와 같은 식탁도구들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을 사용하여 음식을 집었다.
‘자유의 상징’ 프리지아 모자를 후세에 남기다
원래 프리지아 모자는 페르시아의 태양 신 미트라, 아나톨리아의 신 아티스가 썼던 모자였으나 고대 그리스인들도 즐겨 쓰고 다녔다. 당시에 이 모자는 비非그리스인인 파리스를 의미했으나 로마 제정기에는 해방노예나 로마 시민이 된 노예 자손들이 많이 착용해 ‘자유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이후 18세기에는 프랑스 혁명가들이 이 모자를 즐겨 썼다.
“국가가 모든 가정사를 관리해야 한다”
‘사생활’ 개념이 발달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할지 모르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국가가 가정생활에 개입하는 걸 당연시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대표적인 철학가들의 사상에서 잘 드러난다. 플라톤은 지배층 남녀에게 배우자를 고르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라고 제안했으며, 태어난 아기는 공동탁아소로 보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결혼연령을 국가에서 법적으로 지정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에는 개인적 생활의 가치보다는 도시국가의 전체 복지가 훨씬 중요했기 때문에 이런 가치관들이 생겨났다.
Ⅱ. 강력한 제국의 고대 로마인의 생활
더 많이 먹기 위해 이미 먹은 것을 토해 내다
로마인들은 공화국 초기에는 검소한 생활방식을 가졌지만 제정기에 들어서면서 호화롭고 기름진 식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심지어 연회 때마다 먹기 경연대회를 열어 대식가에게 상금을 주었는데, 이 때문에 새의 깃털로 목구멍을 간질여 먹은 것을 토해 내고 다시 먹는 사람도 생겨났다. 통음난무痛飮亂舞가 벌어졌던 바쿠스제는 우리에게 ‘폭음폭식을 하는 로마인’이라는 고정관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잘살기 위해서는 로마로 가라”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는 2-4세기에 인구 백만 명에 육박하는 거대도시가 되었다. 사람들은 잘살기 위해서는 로마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지방 도시에서 사느니 차라리 로마에서 죽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렇게 로마로 몰려드는 인구(특히 서민들)를 수용하기 위해 집합주택이 건축되었는데, 어떤 집합주택은 10층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이런 주택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법도 여성의 욕망을 완전히 막지는 못하다
가부장사회였던 로마에서 이혼하는 권리는 초기에는 주로 남편의 특권이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합법적으로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사유는 첫째, 아내가 독극물을 준비한 경우, 둘째, 간음을 한 경우, 셋째, 포도주를 마신 경우 등 세 가지였다. 특히, 아내가 간음을 한 경우에 남편은 아내를 그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해이해지는 사회적 분위기를 틈타 무리하게 피임을 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메살리나, 율리아, 포파이아 같은 음탕한 여인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게다가 여성의 지위가 점차 향상되면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도 생겨났다.
Ⅲ. 기독교로 무장한 중세인의 생활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던 성城에서의 생활
후대인들은 중세의 성에서 생활하는 게 낭만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성에서의 생활은 매우 불편하고 비위생적이었다. 성의 홀의 바닥은 흙, 돌, 회반죽이나 나무 등으로 되어 있었으며 그 위에 짚이나 풀 따위를 깔았다.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이 짚더미 밑에서는 종종 “맥주, 지방분, 파편, 뼈, 침, 개와 고양이의 배설물, 또 불결하고 더러운 모든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형을 볼거리로 즐기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이면 광장이나 거리는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중세의 엄격한 신분 질서는 사형 방식도 각각 다르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귀족들은 화려한 의상 차림으로 명예로운 죽음(?)인 참수형을 당한 다음에 다시 교수형에 처해진 반면, 평민들은 셔츠 차림으로 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당시 귀족, 평민 가리지 않고 모두 단두대로 끌려 간 것은 죽음의 불평등 현상이 소멸된 것을 의미했다. 살인강도는 질질 끌려 다니다가 교수형에, 대역죄인은 참수형에, 화폐위조범은 솥에서 삶아지는 형에, 마녀나 이단자는 화형에, 수간 및 근친상간이나 동성애자 역시 화형에 처해졌다.
충만한 사랑은 있되 위생 관념은 없다
중세인들은 페스트가 유행하면 밀폐된 공간인 예배당에 모여 신에게 집단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바람에 더 많은 화를 불렀다. 도시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비위생적인 조건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특히 중세인들은 건강과 위생에 대한 많은 미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몸의 질병이 영혼의 죄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명상이나 기도, 순례여행 등 비의료적인 방법에 의지했다.
Ⅳ. 인문주의를 주창한 르네상스인의 생활
의상에서 유행이 시작되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유럽인들은 대개 민족의상을 즐겨 입었다. 그러나 르네상스기에 들어 와서 국제간 교류가 활발해지자 의상은 ‘장소’보다는 ‘시간’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이제 과거의 전통적인 지방의상은 갓 유행하는 새로운 패션에 자리를 양보했다. 토속적인 의상은 단지 농부들의 구식 옷차림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비교적 유사한 스타일의 의상이 한 차례 유행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새로운 스타일의 의상이 유행했다.
‘사생활’ 개념이 싹트다
현대인들의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사생활’은 중세 때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미지의 개념이었다. 튜더 일가는 귀찮은 조신들과 궁정식구들이 들끓는 공동거실에서, 아늑하고 조용한 개인적인 응접실로 기꺼이 후퇴해 버렸다. 그러나 이 당시에 사생활이라는 유별난(?) 관습은 희소성의 가치는 있었으나,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 상류층에서 최초로 시작된 이 새로운 관습은 서서히 확대되기 시작했다. 영주 부부는 더 이상 성의 널찍한 홀 구석에 놓인 캐비닛식 침대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이제는 독립된 침실에서 종자들, 시동, 시녀들을 가까이 거느리고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