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문형범의 독서편력
마치 한 권의 앨범을 보는 듯 구성된 이 부분에서는 형범이가 어떻게 책을 통해 자신을 올곧게 성장시켜왔는지 18년 간의 독서 경험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유년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와 '독서 골든벨'에서 우승했던 일화, 형범이만의 추천도서 목록까지 엿볼 수 있다.
글을 쓰고 읽을 줄 알게 되면서 '책읽기'라는, 무한정의 보물찾기가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아빠가 머리맡에서 읽어주시던 동화책들을 한 장 한 장 내 눈으로 직접 읽어 내려가던 때의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본문 19쪽 '유년의 성城' 중에서.
빨리 좀 집에 가자고 부모님을 찾으러, 나는 그 무렵의 내게 작지 않던 유리문을 밀고 도서관에 발을 내디뎠다. 어렸을 때 한두 번 온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도서관은 생각보다 넓고 복잡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부모님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친 나는 책이나 읽으면서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에 별다른 생각 없이 책을 한 권 뽑아들었다. 그 후로, 일요일은 애타게 기다려지는 날이 되었다. ―본문 23쪽 '초등학생이 되다' 중에서.
한 권 한 권, 두툼한 책들을 읽어갔다. 동서양 철학사의 큰 흐름을 알게 되고,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 중국의 가파른 역사를 다시 만났다. 로마의 영웅들, 18세기 이후 근현대를 이끈 사상가들, 과학자들, 예술가들과도 조우할 수 있었다. ―본문 28쪽 '교복을 입고' 중에서
PART 1 :: 인간을 읽다
1장에서는 책을 쓴 이와 책 속 주인공의 삶, 그리고 그들의 인간적 면모에 초점을 맞췄다. 주로 《체 게바라 평전》《전태일 평전》《백범일지》《위대한 패배자》《위인들의 마지막 하루》 등 인물 이야기와 소설로 채워져 있지만, 정치 처세서인 《군주론》을 읽으며 애처로운 이상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를 재발견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칼의 노래》를 읽고 아산에 있는 현충사에 찾아가 '인간 이순신'과 맞대면했던 이야기는 백미로 꼽을 수 있다.
책 속에서, 그리고 다시 한 번 찾아간 그의 검 앞에서 나는 인간 이순신을 만났다. 그는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칼은 부러지지 않은 채로 남아 아직도 울고 있었다. 나는 칼의 울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깊게 흘렀던 공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차에 올랐지만 칼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본문 39쪽 '칼의 울음 소리를 듣다' 중에서.
'군주는 잔인해질 필요도 있다'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반인반마, 케이론의 상징적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도자란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동물적이어야 함을 고대의 서사가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왕자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스핑크스가 반인반수인 것 역시 우연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본문 42쪽 '애처로운 이상주의자, 마키아벨리' 중에서.
주인공이 택한 길은 결국 자살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누군가는 인생 패배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패배의 기록은 아니다. 오사무의 삶이 투영되어 있기도 한 주인공 요조는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자살은 패배로 기억되기보다 사회에 대한 고발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본문 54쪽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 중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정의를 세상에 관철시키려고 했던 남자. 총을 들고 인민을 구하려 했던 20세기 마지막 리얼리스트는 의자에 묶여 총살당했다. 그는 불가능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자신의 몫으로 삼았기에 죽임을 당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다. 그런 신념과 도전이야말로 인류가 역사를 일궈냈던 등정登頂의 발자취이기 때문이다. ―본문 60쪽 '피투성이 구세주, 체 게바라' 중에서.
PART 2 :: 감성을 읽다
2장은 형범이의 감성이 돋보이는 글들로 채워졌다. 형범이는 《목수》《어린왕자》《천상병을 말하다》와 김소월 시집 등 감성을 자극하는 책들뿐 아니라, 자연과학서인 《엔트로피》를 읽으면서도 자신의 감수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많이 버리는 사람이 많이 가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무소유의 역리다. 중점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분의 글이 세상을 오히려 투명하게 볼 수 있도록 나를 이끌었다. 집착과 욕심에서 벗어나야만, 평안과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는 소유와 행복이 반의어 관계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질적인 성공과 충족은 오히려 행복으로 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 나는 책장을 넘겨가면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떠올렸다. ―본문 76쪽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중에서.
이튿날, 소백한 기슭 부석사에 올랐다. 늦가을 조용한 아침은 젖어 있었다. 서늘한 안개를 마시며 마당에 들어섰다. 시간이 일렀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천천히 경내를 걸었다. 단순히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을까. 부석사는 고요했다. 살짝 들어올려진 처마, 무엇이라도 떠받들 듯 굳게 받치고선 기둥. 이 땅을 가장 오래 버텨낸 사찰 앞에서 나는 내 부족한 언변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본문 82쪽 '천년을 사는 나무' 중에서.
어린왕자가 지나왔던 별에, 우주의 5억 개의 별이 모두 자기 것이라며 별의 숫자를 되풀이하여 세는 상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세고, 또 세고. 세는 데에만 열중해서 사람을 잊은 그의 모습이, 왠지 우리 미래의 모습인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많이 가지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슬플 뿐입니다. ―본문 91쪽 '어른들은 결코 묻지 않는, 가장 중요한 것들' 중에서.
PART 3 :: 상상력을 읽다
3장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전래동화를 비롯해 경쾌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었다. 허버트 조지 웰즈의 《타임머신》과 《파리대왕》, 《이갈리아의 딸들》 등 고전이 된 문학작품들을 읽어내는 시선에서 10대 특유의 발랄함과 사유의 깊이가 동시에 드러난다.
본질을 꿰뚫는 골딩의 서사는 인간의 본성은 이런 것이라고 신랄하게 풍자한다. 그럴 듯하다. 그렇지만, 그게 다인가? 정말로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가? 소설이 아무리 잘 짜여지고, 그것이 현실처럼 느껴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말로 현실인가?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이다. 그것은 골딩의 의도가 짙게 배어든, 현실과 완벽히 겹쳐질 수 없는 또 하나의 다른 세계이다. ―본문 117쪽 '본성, 때로는 씁쓸함' 중에서.
이갈리아의 가능성, 즉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뒤바뀌어 맨움과 움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부터가 현재 지배적인 가부장제에서 남자들이 누리고 있는 사회?문화적인 권력의 필연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책의 저자 게르드 브란튼베르그는 책의 많은 부분에서 이갈리아의 가능성을 논증하기 위해 노력한다. ―본문 120쪽 '성性의 벽의 넘어' 중에서.
인간도 어쩌면 복잡한 생체 로봇이 아닐까 하고 가끔 생각해본다.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뇌'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뇌조차도 기계로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 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복잡한 판단을 이뤄내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언젠가 역방향으로 기계를 통해 인간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본문 114쪽 '로봇과 인간의 원칙' 중에서.
PART 4 :: 과거를 읽다
형범이는 역사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의 사건들과 역사가 흘러가는 메카니즘을 파악해야 하는 이유는 현재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노자, 공자, 제갈량 등 선인들의 글이나 역사서를 대하는 형범이의 시선은 날카롭다. 과거 속에서 선명히 현실을 인식하는 모습에서 이 아이의 사유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느껴진다.
자격과 경력, 문벌에 그는 구애받지 않았다. 부귀를 가려 인재를 등용하지 않았으며,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일을 맡겼다.
당연한 말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당연하고 작은 것조차 제대로 하고 있는가. 그가 세상을 뜬 지 2,00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학연과 지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계 고위층에서는 친인척 비리가 일어나고, 나눠질 것 없는 땅은 남과 북으로 갈려 있고, 거기에서도 산맥을 사이로 우리는 눈을 흘기고 있다. ―본문 133쪽 '제갈량, 시대를 뛰어넘은 기재' 중에서.
오늘날은 노자가 말한 '물'의 시대이기보다는 '불'의 시대다.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말리고, 파괴한다. 노자는 겸손과 유연함, 상생으로서 물을 말했다. 오늘날에 이르러, 노자의 '상선약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얻을 것이 있지 않은가. ―본문 145쪽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중에서.
현대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이들을 여전히 공격한다. 성적 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등. 이런 배타적인 시각으로는 결코 사회 전체의 안정을 이뤄내지 못한다. 사람이든 사회든, 관용과 포용이 중요하다. ―본문 150쪽 '공자, 지혜의 바다' 중에서.
국운이 쇠할 때에는 어떠했을까. 그럴 때마다 그곳엔 부정부패가 있었고, 환락과 사치가 있었으며 민중의 눈물이 있었다. 삼천의 궁녀와 밤낮을 즐기던 백제의 의자왕이 있었고, 신라의 마지막엔 포석정의 연회가 있었다. 고려의 몰락은 권문세가로 집중된 토지 소유와 불교의 타락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지방관들의 민중 수탈, 매관매직, 지리멸렬한 당파싸움. 조선은 오랫동안 몸살을 앓았고,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하게 된다. ―본문 172쪽 '무한의 반복, 역사' 중에서.
PART 5 :: 만화를 읽다
주변의 사소한 사건과 현상들을 보면서도 자신의 사유를 담아내고자 하는 형범이에게 있어, 만화는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다. 새로운 상상력으로 통하는 창구다.
스스로 '황금의 시절'이라고 부르는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아무리 밤새워 게임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도 시간은 어디 쌓아뒀다가 나중에 다시 쓰고 싶을 만큼 많았다. 그래서 형범이는 만화책을 집어들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노트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절대성의 신봉자들이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절대성을 믿는 사람들.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을 믿어왔던 사람들이다. 주인공에게나, 그들에게 있어 처단해야 하는 '악'은 확실히 저편에 보이는 것이었다. ―본문 181쪽 '정의? 진리?' 중에서.
등가교환이라……. 연금술의 세계에선 정말로 그것이 가능할까. 연금술을 이용해 적들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왠지 모르게 씁쓸해졌다. 꿈같은 이야기다. 등가교환이라고 하는 건. 들인 만큼, 딱 그만큼,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건 농담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본문 190쪽 '황금의 세계' 중에서.
PART 6 :: 세상을 읽다
형범이는 거장들의 권위에 주눅 들어 그들의 주장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명저라고 이름난 책을 읽으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거침없이 반박한다. 6장에서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형범이가 설익은 것이나마 자신의 사유와 목소리를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 형범이가 세상을 대하는 당당한 태도가 두드러진다.
천상병 시인의 〈나의 가난은〉도 문학 시간에 만났던 수많은 시 중 하나였다.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을 뜻한다. 그리고 내가 만났던 시와 시인 천상병은 나를 많이 바꿔놓았다.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 값이 남았다는 것. 그리고, 그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으면서 천상병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본문 204쪽 '소유를 위한 존재, 존재를 위한 소유' 중에서.
과학적 디스토피아가 머지 않아 인류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또 한 명의 천재가 나타나 한 줄의 수식으로 인류의 미래를 바꾸어놓을지 말이다. 지금껏 과학은 수많은 '만약'과 'if'들을 현실로 이루어왔다. 앞으로도 과학은, 그것마저 뛰어넘어 상상조차도 못했던 일들을 이뤄낼 것이다. ―본문 221쪽 '과학은, if' 중에서.
아탈리는 유목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움직이지 않으면 사라지리라는 경고, 변화하지 않으면 쇠퇴하게 된다는 경고는 예나 지금이나 있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정주 역시 인간의 본성이다. 정주와 유목은 꼬리를 물고 반복됐으며 인간의 역사는 이러한 반복 속에서 씌어졌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본문 232쪽 '유목은 인간의 본성일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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