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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의 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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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7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43쪽 | 219g | 153*224*20mm
ISBN13 9788992680031
ISBN10 899268003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김경윤
1957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무크지 『민족현실과 문학운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아름다운 사람의 마을에서 살고 싶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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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장 위에 늙은 신발들이 누워 있다
탁발승처럼 세상 곳곳을 찾아다니느라
창이 닳고 코가 터진 신발들은 나의 부처다
세상의 낮고 누추한 바닥을 오체투지로 걸어온
저 신발들의 행장行狀을 생각하며, 나는
촛불도 향도 없는 신발의 제단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신발에게 경배한다
신발이 끌고 다닌 수많은 길과
그 길 위에 새겼을 신발의 자취들은
내가 평생 읽어야 할 경전이다
나를 가르친 저 낡은 신발들이 바로
갈라진 어머니의 발바닥이고
주름진 아버지의 손바닥이다
이 세상에 와서 한평생을
누군가의 바닥으로 살아온 신발들
그 거룩한 생애에 경배하는
나는 신발의 행자行者다
- 「신발에 대한 경배」 전문

산딸나무 그늘에
흑염소 한 마리 맴돌고 있다
콩밭 매는 어머니
등이 호미처럼 굽었다

호미 끝에 묻어나는
흙빛 같은 저 손 좀 봐라
한 가계를 지탱해온 고단한 내력이
그 손바닥에 장편長篇처럼 새겨져 있느니
산딸나무 잎새에 일렁이던
햇살 한 자락
설핏, 어머니 굽은 등에
어둑어둑 얹히는 저물녘

밭둑에 매어 둔 새끼염소
먹먹한 울음소리
어스름 내리는 서산마루를
불그무레 적시고 있다
- 「저물녘」 전문
---- 본문 중에서

전문가 리뷰 전문가 리뷰 보이기/감추기

수묵처럼 번져가는 어스름의 언어들
유성호(문학평론가, 한국교원대 교수)


1.
김경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신발의 행자』(문학 들, 2007)는, 첫 시집 『아름다운 사람의 마을에서 살고 싶다』(내일을 여는 책, 1996) 이후 10여 년의 시간을 온축하면서, 삶의 다양하고도 심원한 문양文樣을 응집력 있게 보여주는 성과이다. 첫 시집에서 ??참숯 같은 희망??(「그리움」)을 뒤로 한 채 지나온 시간에 대한 가없는 그리움을 보여주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는 자신의 삶 속에 오래도록 깃들여 있던 ??시간??의 다양한 형식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중년에 이른 이의 깊이 있는 사유와 감각의 진경進境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서정시는 ??시간??에 대한 경험과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양식적 특성을 보편적으로 지닌다. 그만큼 서정시는 시간의 다양한 형식을 다루게 되고, 우리는 서정시가 수행하는 시간 탐색을 통해 삶의 근원과 궁극에 대한 상상적 경험을 치르게 된다. 서정시가 환기하는 그러한 시간의 형식에 자신의 상상력과 경험을 투사하면서 삶의 소롯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최근 김경윤 시편들은, 서정시가 환기하는 이러한 ??시간??의 형식에 대한 사유와 감각으로 매우 충일하다. 특별히 시집 첫머리에 실려 있는 다음 시편은, 그러한 속성을 견고하게 담아내고 있는 가편佳篇이 아닐 수 없다.

신발장 위에 늙은 신발들이 누워 있다
탁발승처럼 세상 곳곳을 찾아다니느라
창이 닳고 코가 터진 신발들은 나의 부처다
세상의 낮고 누추한 바닥을 오체투지로 걸어온
저 신발들의 행장行狀을 생각하며, 나는
촛불도 향도 없는 신발의 제단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신발에게 경배한다
신발이 끌고 다닌 수많은 길과
그 길 위에 새겼을 신발의 자취들은
내가 평생 읽어야 할 경전이다
나를 가르친 저 낡은 신발들이 바로
갈라진 어머니의 발바닥이고
주름진 아버지의 손바닥이다
이 세상에 와서 한평생을
누군가의 바닥으로 살아온 신발들
그 거룩한 생애에 경배하는
나는 신발의 행자行者다
- 「신발에 대한 경배」 전문

신발장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늙은 신발들??은, 탁발승처럼 세상 곳곳을 찾아다니느라 분주했던 오랜 ??시간??에 대한 은유적 상관물이다. 그 낡고 닳은 신발들을 시인은 ??부처??라 이름하고 있는데, 이는 그 신발들이 ??누군가의 바닥으로 살아온?? 행장行狀을 지닌 수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부처??의 행장이 시인의 연대기와 고스란히 겹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리게 된다. 이때 ??촛불도 향도 없는 신발의 제단??은 시인 자신이 살아온 생의 현장이 되고, ??늙은 신발(부처)??에 대한 밤낮없는 경배는 자신의 생에 대한 연민 어린 성찰과 상상적 등가를 이룬다. 자연스럽게 ??신발이 끌고 다닌 수많은 길??과 그 위에 새겨진 ??신발의 자취들??은, 시인이 평생 읽어야 할 경전인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이 써온 ??시詩??가 되기도 한다. 그 거룩한 신발의 생애 앞에서 시인은 ??나는 신발의 행자行者??라고 고백함으로써, 결국 ??신발=부처=詩??라는 등식을 구성해내는 것이다.(물론 이 시편의 표면에는 ??시??라는 기표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신발의 행자??라는 고백은, 시인으로서 견지하고 있는 깊은 자의식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김경윤 시편의 행방을 뚜렷이 암시하고 있다. 하나는 그가 오랜 시간의 형식(??늙은 신발??)을 사유하고 표현했다는 점이고, 둘은 ??바닥??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부처가 된 존재들(??어머니의 발바닥??과 ??아버지의 손바닥??)을 시 안으로 호명했다는 점이고, 마지막은 그 스스로 ??바닥??을 살아냄으로써 ??시詩??의 궁극적 형식에 다다르기 위한 고투(??탁발승처럼 세상 곳곳을 찾아다니느라/창이 닳고 코가 터진 신발??)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 길지 않은 글은, 이러한 김경윤 시편의 최근 행방을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2.
김경윤 시인이 원초적 기억과 사랑을 실어 형상화하고 있는 시간의 형식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애를 통해 가장 잘 나타난다. 그의 시편 속에 모습을 보이는 부모의 행장은, 「신발에 대한 경배」에서 이미 ??갈라진 어머니의 발바닥/주름진 아버지의 손바닥??으로 암시된 바 있다. 그야말로 ??바닥??으로 점철된 시간이 그분들의 정결한 생애를 결속하고 있는데, 그만큼 그분들의 ??발바닥/손바닥??에 새겨진 주름이 바로 시인이 제일 먼저 써야 할 ??시??의 문양이었던 것이다.

새벽같이 논에 나간 아버지가 경운기와 넘어지셨다.
평생 흙바닥만 기어온 거북이 한 마리,
읍내 병원 하얀 시트 위에 납짝 누워있다.
통증을 참으려고 움켜쥔 거북등 같은 손,
이 손을 잡아본 게 언제였던가, 기억이 없다.
낯선 사람들과 친교를 위해 수없이 나누었던 악수,
정작 아버지완 뜨겁게 잡아본 적 한 번 없었다니!
사장나무 아래 들독처럼 늘 덤덤하시던 분,
그 돌같이 굳은 손, 처음인 듯 마주잡은 순간,
손바닥의 혈맥을 타고 뜨겁게 전해오는 피의 온기가
울컥, 눈물의 둑을 허물고야 만다.
모로 누운 아버지의 둥근 등 말없이 바라보다
거북이 등처럼 딱딱한 손등 찬찬히 어루만져본다.
무슨 경전처럼 무수한 갑골문胛骨文이 새겨져 있다.
먹물깨나 먹고 수백 권의 책을 읽었다는 나도
쉬이 다 읽어낼 수 없는 그 생의 활자活字들이
젖은 내 손바닥 안에서 마구 꿈틀거린다.
- 「갑골문」 전문

오랫동안 한몸이었을 아버지와 경운기가 같이 넘어졌다. 시인은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평생 흙바닥만 기어온 거북이 한 마리??라고 묘사한다. 느릿느릿 바닥만 기어온 한 마리 거북이의 등처럼 아버지의 손은 갈라져 있다. 아버지는 그 ??손??에 무슨 경전처럼 무수한 갑골문胛骨文을 새긴 채 살아오셨다. 그 손을 처음인 듯 마주잡으면서 아버지의 온기를 느끼고 있을 때, 시인은 그 갑골문이 ??쉬이 다 읽어낼 수 없는?? 것임을 알아차린다.
원래 ??갑골문??은 신탁용神託用 갑골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상형문자 원본을 뜻한다. 시인이 아버지의 손등에 새겨진 깊은 주름들을 ??갑골문??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바로 자신이 경배해야 할 또 하나의 ??늙은 신발??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아버지의 고물」이라는 시편에서, 아버지의 이력이 낱낱이 새겨진 고물들을 버리는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깨어나 빛을 향해 사라지던 새 한 마리??를 보게 된다. 이러한 환각은, ??갑골문??을 몸에 새긴 채 평생을 바닥으로 살아오시다가 이제 효용성을 다한 고물처럼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가, 어둠 속에서 깨어나 빛을 향해 사라지는 ??부처??가 되는 풍경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아버지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늙은 신발??처럼 천천히, 아무나 읽어낼 수 없는 ??생의 활자??로 걸어오신 것이다.

산딸나무 그늘에
흑염소 한 마리 맴돌고 있다
콩밭 매는 어머니
등이 호미처럼 굽었다

호미 끝에 묻어나는
흙빛 같은 저 손 좀 봐라
한 가계를 지탱해온 고단한 내력이
그 손바닥에 장편長篇처럼 새겨져 있느니
산딸나무 잎새에 일렁이던
햇살 한 자락
설핏, 어머니 굽은 등에
어둑어둑 얹히는 저물녘

밭둑에 매어 둔 새끼염소
먹먹한 울음소리
어스름 내리는 서산마루를
불그무레 적시고 있다
- 「저물녘」 전문

시인은 어머니의 생을 다룬 「어리굴젓」이라는 시편에서, ??뻘밭 같은 생生을 살아온 울 엄매??의 눈물을 자신의 오십 생애가 파먹고 살았노라고 아프게 고백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한밤중에 장롱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기침소리거나 한숨소리 같은/저 울음은 늙은 어머니를 닮았다??(「장롱이 운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눈물??과 ??울음??의 생애를 살아오신 어머니가, 위 시편에서는 ??저물녘??이라는 시간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계시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물녘에 어머니가 콩밭을 매고 있다. 어머니의 등은 ??호미??처럼 굽어 있고, 어머니의 손은 ??흙빛??을 닮았다. 그 손으로 어머니는 ??한 가계를 지탱해온 고단한 내력??을 꾸려오셨다. 어머니의 손바닥에 장편長篇처럼 길고 아득하게 새겨져 있는 시간들은, 마치 아버지의 손등에 새겨진 ??갑골문??처럼, 쉬이 다 읽어낼 수 없는 생의 활자로 존재한다. 그때 햇살이 어머니의 굽은 등에 어둑어둑 얹히고, 그 저물녘 풍경은 새끼염소의 먹먹한 울음소리에 얹혀 번져간다. 여기서 ??저물녘??은 일차적으로는 시간적 배경이 되겠지만, 심층적으로는 어머니의 생을 은유하는 시간적 표현이 된다. 이러한 어머니의 저물녘 모습은 다른 시편에서 ??섣달그믐 요요한 별빛 아래 서 계시는 어머니의 굽은 등이 그날 따라 왜 그리도 늙은 감나무를 닮았던지??(「감나무 아래서의 참회」) 같은 표현으로 옮겨간다.
??늙은 신발??이자 ??늙은 감나무??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애는 이제 ??시간의 무늬처럼 수묵水墨으로 번지는 어스름??(「달마와 보낸 달포」) 속에서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시인으로서는 그분들의 생애를 통해 ??꼬물꼬물 살아서 기어가는 내 영혼의 활자들??(「쉬」)을 구성하고 있고, 우리는 그분들의 생이 ??한없이 번지는 것??(「봄밤」)을 그의 시편 속에서 느끼게 된다. ??바닥??으로 살아오면서 스스로 부처가 된 존재들을 통해, 그리고 그들의 생애가 보여주는 아련하고도 쓸쓸한 ??번짐??을 통해, 김경윤 시인은 오랜 시간의 한 형식을 선명하게 부조浮彫하고 있는 것이다.


3.
중년에 이른 시인이 수행하는 시간 탐색의 과정을 단단하게 담고 있는 『신발의 행자』는, 이처럼 ??새 세계의 탄생을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는/여백??(「빈 수첩들」)을 10여 년 동안 갈무리한 결과로 다가온다. 이 시집을 통해 우리는 ??짠한 마음으로 잠 못 들던??(「그 밤의 살생」) 시인의 오랜 시간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가령 다음 시편은 시인이 시를 써온 오랜 시간을 고백하면서, 사물 속에 깃들여 있는 ??시간??을 굴착하고 있는 뚜렷한 사례라 할 것이다.

나무들에게 가고 싶어서
속살 깊이 침묵의 나이테를 키우는
나무들에게 기대고 싶어서

한지에 먹물 번지듯
어둠이 산 아래 마을로 번져오는
이 가을 저녁, 나는
침묵 하나 거느리고 억새밭을 지나
뒷산 가시나무숲을 오른다

적막한 숲 속에서
허공에 파문을 내며 날아오르는 갈가마귀떼들
꽃치자빛 노을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진
서편 하늘이 일순 먹먹하다

서늘한 초저녁 별들이 안부를 묻는
숲으로 가는 이 가을 저녁
저 산 아래 마을에선 또 누가 이 세상을 떴는지
마을 초입에 걸린 조등弔燈 하나 꽃처럼 붉다

어둠이 나를 지울 때까지
나무들의 침묵에 기대어 이승의 길을 묻는
나의 말은 아직 너무도 서툴고.
- 「숲으로 가는 가을 저녁」 전문

이 시편 역시 ??어스름?? 속에서 발견한 시간의 형식을 담고 있다. 시인은 ??한지에 먹물 번지듯/어둠이 산 아래 마을로 번져오는/이 가을 저녁??에 숲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서도 수묵처럼 번져가는 어스름의 시간이 선택된 셈이다. 이처럼 시간이나 풍경이 서서히 옮겨간다는 일종의 ??번짐(번져감)??의 상상력은, 이번 시집을 가로지르는 핵심적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언뜻 눈에 띄는 것만 나열해보아도 ??저녁 어스름이 수묵처럼 번진다??(「공재 화첩 1 - 우후산수도」), ??수묵처럼 번지는 어스름 속??(「공재 화첩 2 - 백마도」), ??찔레꽃 향기로 번지는 어스름 속??(「논물 드는 저녁 무렵」), ??한지에 먹물 번지듯/어스름 내리는 숲새??(「산벚꽃 지는 저녁」) 등으로 확산되면서 이러한 상상력과 표현은 완강한 일관성마저 보여준다.
그 어스름이 번져가는 시간 속에서, 시인은 숲을 오른다. 그때 하늘에서는 허공에 파문을 내며 서쪽으로 사라지는 갈가마귀떼들이 번져가고 있고, 산 아래에서는 꽃처럼 붉은 ??조등??이 은은하게 번져가고 있다. 그런데 서서히 어둠이 번져갈 무렵 시인은 ??나무들의 침묵에 기대어 이승의 길을 묻는/나의 말은 아직 너무도 서툴??다고 말하고 있다. 서서히 번져가고 있는 사물들과 달리 ??나의 말??은 그처럼 은은하게 침묵으로 번져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이 절망의 힘으로 시를 쓴다. 그 절망의 힘으로 ??무수한 상처의 길??(「달마에 들다」)을 지나 ??침묵의 시??(「달마와 보낸 달포」)에 가 닿고 있는 것이다.

천년의 그늘을 거느리고 사는
만일암 옛터 느티나무는 천수관음千手觀音을 닮았다
먼 옛날 해를 매달았다는 이 절의 슬픈 전설을
제 몸 안에 침묵의 나이테로 새겨두고
올봄도 수천 개의 손을 내밀고 있다
세월이 할퀴고 간 무수한 상처를 안고도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바람의 경經을 읽고 있다니,
태풍이 앗아간 절간 하나 몸 안에 들여놓고
수천 페이지의 초록경전을 펼쳐놓았다
속살에 새겨진 시간의 주름살 차마 펼쳐볼 수 없지만
하늘을 날다 지친 새들이나 숲속에 뛰놀던 짐승들이
천년 동안이나 그의 그늘로 찾아왔으리라 생각하니,
그를 느티나무 부처라고 불러도 좋겠다
대숲에 바람소리 새소리만 가득한 폐사지
오층석탑 하나 오롯한 적멸보궁에서
관음보살처럼 수천 개의 손을 가진 느티나무가
노을에 비낀 잎사귀마다 찬란한 연꽃을 피우고 있다
- 「느티나무 부처」 전문

암자 옛터에 있는 ??느티나무??는 오랜 시간을 자신의 육체 속에 품은 채 천수관음千手觀音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 만일암의 슬픈 전설을 침묵의 나이테로 새겨둔 그 나무는 수천 개의 손을 내밀면서 바람의 경전을 읽고 있다. 이때 시인은 ??속살에 새겨진 시간의 주름살??을 읽어낼 수는 없지만, 천년 동안 숲속 짐승들의 귀소歸巢가 된 그 나무를 ??느티나무 부처??라고 불러도 좋지 않은가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느티나무 부처??가, 「신발에 대한 경배」에서 ??창이 닳고 코가 터진 신발들은 나의 부처??라고 말한 것의 연장임을 알 수 있다. ??늙은 신발??이 바닥을 기어와 스스로 부처가 된 존재라면, 새소리만 가득한 폐사지에서 ??노을에 비낀 잎사귀마다 찬란한 연꽃을 피우고?? 있는 ??느티나무??는 뭇 존재들의 거소居所가 되어준 크낙한 품의 부처인 것이다. ??나무??의 생태를 ??부처??의 그것으로 치환하여 구성한 이 시편의 사유 방법은, 늙은 은행나무 부부를 두고 ??제 생을 빛내던 수천의 황금 동전닢들/가난한 흙 속의 벌레들에게 죄 나눠주고/풍장風葬의 주검처럼 앙상한 몸으로 서서/한줌 햇살에도 아미타불처럼 환하게??(「은행나무 부부」) 웃는다고 묘사하는 것과 동궤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핀 것처럼, 김경윤 시편은 은은하게 어스름이 번져가는 숲 속에서, 찬란한 연꽃을 피우는 저물녘의 나무들 속에서, 사물들의 오랜 시간을 표상하고 있다 할 것이다.


4.
어스름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궁극적 형식을 ??부처??로 바라보고, 거기에 경배와 기억의 상상력을 부여하고 있는 김경윤 시편들은, 낮은 목소리를 통해 우리의 삶에 비상한 활력을 부여하는 특장을 갖고 있다. 이는 시인의 노래가 ??살처럼 흘러간 세월들 생각하며/갯바람 속에서 불렀던 소금기 젖은 회한의 노래??(「그 겨울의 궁항」)에 그치지 않고, ??마음의 묵정밭 갈아 새 길을 내는/말의 행로行路??(「피투성이 시집」)와 적극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음 시편은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가 얼마나 호활浩闊하면서도 깊은 것인가를 시사하는 경우이다.


양지쪽보다는 그늘 쪽으로 마음이 기울면서부터
그녀를 오래 마음 속에 두고 살았다
종갓집 며느리처럼 후덕한 잎사귀와 속 깊은
그늘을 가진 후박厚朴
아침저녁으로 그녀 곁을 지날 때마다
몇 번인가 말을 걸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침묵의 문을 열지는 못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무렵
나무 그늘 아래서 깔깔대던 여학생들처럼
그녀는 얼굴 가득 노란 웃음꽃을 터뜨렸다
나는 처음으로 나무들도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섰던 자리에 그늘이 사라지고
빛방석 같은 그루터기만 둥그렇게 남았다
그늘보다 빛을 쫓는 누군가가 그녀를 참수斬首해 버렸다
이 지상에서 그녀가 거느렸던 그늘과 정들었던 눈빛들
문신처럼 나이테로 새겨두고 순명順命하던 날,
그늘이 사라진 교정에서 나는 보았느니
쟁쟁한 햇살 아래서 키 작은 단풍나무가
눈물처럼 붉은 이파리 몇 잎 떨구고 서 있는 것을,
서녘 하늘에 노을빛 만장이 걸리고
어둠 속으로 구름의 장례객들이 떠나갈 즈음
유언遺言처럼 개밥바라기 별빛이 오롯이 빛나는 것을
- 「후박나무의 장례」 전문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교정에서 보았던 ??후박나무??가 어느날 베어졌다. 그것을 베어버린 것은, 그늘보다 빛 쪽으로 마음이 기운 사람이라고 시인은 추측한다. 그 결과 ??후덕한 잎사귀와 속 깊은/그늘을 가진 후박厚朴??은 ??빛방석 같은 그루터기??만 남게 되었다. 지상에 드리웠던 그늘을 거두고 순명順命한 후박나무를 두고, 단풍나무는 눈물처럼 붉은 잎을 떨구고, 서녘 하늘의 노을은 만장처럼 번져가고, 어둠 속의 구름은 장례 행렬처럼 흘러간다. 또한 후박나무가 남긴 ??유언??은 초저녁 하늘의 ??개밥바라기 별??로 빛난다.
이러한 후박나무에 대한 상상적 장례 제의祭儀는, 문명의 편의를 위해 그늘의 신비를 버린 사람들에 대한 우회적 비판을 담고 있는 동시에, ??수묵처럼 번져가는 어스름의 언어들??이 바로 그 후박나무가 남긴 ??유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후박나무는 죽어서 그늘을 빼앗겼지만, ??개밥바라기 별빛??의 오롯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두 가지만 첨언하기로 한다. 먼저 김경윤 시편이 미당未堂과 현저한 상호텍스트성을 지닌다는 점을 말해두자. 가령 ??누군가는 내 눈가에서 우수憂愁의 그늘을 보고 가고/또 어떤 이는 내 얼굴에서 연민의 정을 느끼고 가지만/나는 한번도 한양의 불빛 그리워 한 적 없다??(「공재 화첩 3 - 자화상」)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미당의 「자화상自畵像」을 떠올리는 것은 무척 자연스럽다. 또한 ??당신의 생애도 팔할이 눈물??(「어리굴젓」)이라든가 ??푸른 은핫물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별빛??(「그리운 북두칠성」), ??하이얀 콩꽃에도 아롱아롱 눈물??(「내 마음의 소쩍새」), ??수묵水墨으로 번지는 어스름??(「달마와 보낸 달포」) 같은 표현은 미당의 「자화상自畵像」, 「귀촉도歸蜀途」, 「격포우중格浦雨中」에서 적극적으로 인유引喩한 결과이다. 시가 지향하는 의식이나 정서에서 많은 차이를 빚고 있으면서도, 시인은 언어와 표현에서 암암리에 번져온 미당의 흔적을 자못 감염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김경윤 시편 곳곳에 묻어 있는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 꽃병 하나??(「꽃병」)에 대한 기억에 관해서이다. 그는 오랜 시간 자신의 존재를 규율해왔던 첨예한 목소리를 아직도 몸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 ??죽비소리 같은 목소리가 소파에 앉아 있는 내 등짝을 친다??(「나락의 다비식」)고도 말한다. 물론 김경윤 최근 시편들은 ??일순 무슨 우주의 비밀이라도 엿본 양/귓속이 먹먹하고 가슴이 다 쿵쿵??(「달빛 精舍」)거리는 순간을 형상화하는 데 무게중심을 할애하고는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게 시는 ??관념이 아니라 사실寫實??(「공재 화첩 2 - 백마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신발의 행자??를 자임해온 그가 사람살이의 구체성에 즉卽한 시편들을 다음 시집에 더 많이 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신발의 행자』는, 어느 시편을 인용해도 좋을 만한 일관된 균질성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수묵처럼 번져가는 어스름의 언어들을 통해, 매우 선명한 주제의 응집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언어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시간의 형식을 경험하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김경윤의 두 번째 시집은, 우리의 경험과 기억 속으로 서서히 번져갈 만한 힘을 갖고 있다 할 것이다.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김경윤 시의 일취월장이 눈부시다. 오랜 세월 해남 땅끝에서 눈빛이 바다를 닮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또 지금까지는 시보다는 세상을 올바르게 바꾸어내는 일에 전력을 쏟아온 그다. 최근엔 김남주 시인 기념사업회 회장까지 맡는 바람에 시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시 쓸 틈을 많이 못 내더니, 이제 드디어 시로써 그를 말하게 되었다. 우선 그 가슴 아리는 서정성, 대상에 대한 사무치는 애정, 불교적이라거나 생태적이라거나 할 것 없는 그윽한 깨달음, 갑골문 같은 삶과 역사에 대한 무한한 겸손과 긍정 등은 농익은 사유와 함께 땅끝 바다의 해조음海潮音을 이룩하고 있다.
_ 고재종 시인

『신발의 행자』는, 어느 시편을 인용해도 좋을 만한 일관된 균질성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수묵처럼 번져가는 어스름의 언어들을 통해, 매우 선명한 주제의 응집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언어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시간의 형식을 경험하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김경윤의 두 번째 시집은, 우리의 경험과 기억 속으로 서서히 번져갈 만한 힘을 갖고 있다 할 것이다.
_ 유성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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