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왕 유비는 한나라 고제의 형인 유중의 아들이다. 고제는 천하를 평정한 뒤 7년째 되던 해에 유중을 대나라의 왕으로 세웠다. 그렇지만 유중은 훙노가 대나라로 쳐들어오자, 귿게 지키지 못하고 봉지를 내버리고 달아나 샛길로 해서 낙양으로 들어가 천자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고제는 그와 한 형제였으므로 법에 따라 다스리지는 못하고, 그의 왕위를 폐하고 합양후로 삼았다.
고제 11년 가을,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켜 형(荊) 땅을 병합하고, 그 나라의 군사를 위협하여 서쪽으로 회수를 건너 초나라를 바쳤으므로, 고제는 몸소 장수가 되어 토벌에 나섰다. 그 당시 유중의 아들 패후 비는 스무 살로 기개와 힘이 있었으므로 기장의신분으로 고조를 수행하여 기의 서쪽 회추에서 영포의 군대를 깨뜨렸다. 영포는 달아났다. 형왕 유고가 영포의 손에 죽었는데, 후사가 없었다. 오군과 회계군 사람들은 날쌔고 사나웠기 때문에, 고제는 이들을 제압할 만한 힘을 가지 ㄴ왕이 없는 것을 걱정하였다. 고제의 아들들은 모두 어렸으므로 비를 패에 세우고 오왕으로 삼아 3개 군 53개 성을 다스리도록 했다. 고제는 왕인을 내리고, 비를 불러 그의 관상을 찬찬히 뜯어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너의 얼굴에는 모반의 상이 있다.”
고제는〔모반의 상이 있는 자를 오왕으로 책봉한 것을〕속으로 후회하였으나, 이미 임명한 뒤였으므로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이렇게 삼가도록 했다.
“앞으로 50년 뒤에 한나라의 동남쪽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설마 너이겠느냐? 천하는〔너와〕같은 성을 가지고 있는 한집안이니, 삼가며 모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유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감히 그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 pp.184~185
여태후 때의 가혹한 관리로는 후봉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황족들을 가혹하게 능멸하고 공신들을 함부로 욕보였다. 그러나 여씨 일족이 망하자 드디어 후봉 일족도 주멸되었다. 효경제 때에는 조조가 법을 각박하고도 가혹하게 만들었고 법가의 술책을 운용하여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오ㆍ초 등 7국의 난은 조조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일어났으며, 조조는 결국 처형되었다. 그 뒤로는 질도와 영성의 무리가 있었다.
질도는 양(楊) 땅 사람으로 낭이 되어 효문제를 섬겼다. 효경제 때는 중랑장이 되어 과감하게 직간하였으며, 조정의 대신들을 눈앞에서 꺾어눌렀다. 그는 일찍이 효경제를 따라 상림원(上林苑)에 간 일이 있었다. 그때 가희가 변소에 갔는데, 갑자기 멧돼지가 변소로 뛰어들었다. 효경제는 질도에게〔그녀를 구해주도록〕눈칫을 했으나, 질도는 꼼짝도 하지 않으려 했다. 효경제가 몸소 무기를 들고 가희를 구하려 하자, 질도는 황제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했다.
“희 한 명을 잃으며 또 다른 희를 얻으면 됩니다. 천하에 어찌 가희 같은 여자가 없겠습니까? 폐하께서 만일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신다면 종묘나 태후는 어찌합니까?”
황제는 몸을 되돌렸고 멧돼지도 달아나 버렸다. 태후는 이 소문을 듣고 질도에게 황금 백 근을 내려 주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황제는 질도를 중용했다.
제남군의 간씨는 300여 가구나 되는 호족이다. 간씨 일족은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했지만, 2,000석의 관리들 중에 이들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효경제는 질도를 제남군의 태수로 임명했다. 질도가 부임하여 간씨 일족 중 가장 포학한자의 일가를 주멸해 버리니, 그 나머지 간씨들은 두려워 벌벌 떨었다. 1년 남짓 지나자, 제남군에서는 질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는 사람이 없었다. 근방 10여 군의 태수들은 질도를 대부 사람을 대하듯 외경했다.
질도는 사람됨이 용감하고 기개와 힘이 있었으며 공정하고 청렴했다. 그는 사사로운 편지를 받으면 열어 보지 않았고, 남이 보내온 선물도 받는 법이 없었으며, 남의 청탁이나 안에서 의뢰하는 말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어버이를 등지고 벼슬살이하는 이상 이 몸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고 절개를 지키다가 관직에서 죽을 뿐이다. 처자식조차도 돌보지 않겠다.”
질도는 중위로 전임되었다. 그 당시 승상이었던 조후(條候) 주아부(周亞父)는 매우 고귀한 신분이었으나, 질도는 그를 만날 때마다 가볍게 읍할 뿐이었다. 이 당시 백성들은 순박하여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조심했다. 그러나 질도만은 엄하고 가혹한 법을 제일로 여겨〔법을 적용할 때는〕귀족이나 외척까지도 꺼리지 않았다. 그래서 제후나 황족들은 질도를 볼 때마다 곁눈질로 보고, 보라매(蒼鷹: 융통성이 없는 가혹한 관리라는 뜻)라고 불렀다.
임강왕이 조서에 의거하여 중위부로 소환되어 취조를 받게 되었다. 그때 임강왕은 도필을 빌려 천자께 사죄하는 글을 쓰려고 했으나, 질도는 법에서 금하는 것이므로 부하에게 주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위기후 두영이 몰래 사람을 시켜 임강왕에게 도필을 넣어 주었다. 임강왕은 천자께 사죄하는 글을 쓰고 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죄를 꾸며 질도를 중상했다. 결국 질도는 면직되어 집으로 돌아갔으나 효경제는 사자에게 부절을 가지고 질도의 집으로 보내 그를 안문군 태수로 임명하였다. 조정에 들러 하직 인사를 할 것 없이 직접 임지로 떠나게 하고, 아울러 임지에서는〔조정의 명령을 기다릴 것 없이〕편의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흉노는 평소부터 질도의 지조를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변경에 있던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그들은 그 뒤로 질도가 죽을 때까지 다시는 안문군 가까이 오지 않았다. 흉노는 질도의생김새를 본떠 만든 인형을 놓고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개 했으나 아무도 맞추지 못할 정도로 질도를 두려워했다. 질도는 흉노의 근심거리였다. 그 뒤 두태후는 끈내 질도를 한나라 법에 걸어 처벌하려 했다. 효경제가 말했다.
“질도는 충신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를 용서하려 하자, 두태후가 말했다.
“임강왕은 충신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결국 질도는 목이 베어지고 말았다.
--- pp.487~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