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경우 플라톤 이래 영원성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변성 내지 정지된 시간성을 약속하는 저 피안으로 가는 열차를 타려고 한 것은 아닐까. 플라톤(Platon)의 이데아라는 개념이 그랬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는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의 기독교적 피안도. 가변성을 가두는 불변적 형식인 칸트의 시공간이나 범주(categories)도, 아니면 '영원한 미소'를 찾아 헤매던 르네상스의 미적 이상의 세계도, 가변적인 것 속에서 그것을 포착하는 항성적이고 불변적인 지향성을 찾으려던 후설적 자아의 불변적 노에시스(noesis)도, 혹은 기하학적 형태에서 미적 이상을 찾으려고 했던 세잔(Cezanne)에 이르기까지, 가변성의 기차 안에서조차 끊임 없이 불변적인 영원성을 찾으려는 시도야 한이 없지 않았던가. 가변성의 기차를 타고 불변성을 찾아가는 영원성의 모험, 이 거대한 역설을 '영원성의 역설'이라고 부르자.
- 이진경, 은하철도99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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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오시마 마모루
포커스 :
잃어버린 미래. 현실의 절망을 보상받으려는 듯 젊은이들은 현실 같은 가상의 게임 세계에 빠져든다. 주인공 애슈도 이들 중 한 명. 뛰어난 솜씨를 인정받는 최강의 플레이어이지만, 파티를 만들지 않고 언제나 혼자 사우는 고독한 여전사로 주목받고 있다. 이들 모두의 목표는 단 하나, 아바론의 초종 단계인 스폐셜 A에 도달하는 것. 주인공 애슈도 결국은 자신의 파티를 만들어 스폐셜 A에 도전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옛 동료 머피를 만나게 된 애슈는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혼동하게 되는데……. 영화 『아바론』은 오시이 마로루의 작품들이 늘 그렇듯, 아득한 절망 속에서도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오시이 마모루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얘기했던 『공각기동대』에 이어 『아바론』에서는 각자의 꿈이 어떻게 현실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봤을 미래의 꿈. 하지만 그 꿈을 이루는 사람은 흔지 않다. 꿈은 대부분 '맹목적 믿음'으로 끝나버리기 일쑤이다. 사람들은 쉽게 현재의 삶과 타협하기도 하고 때론 아름다웠던 과거에 얽매여 푸념만 늘어놓는다. 미래의 꿈은 결국 '하늘의 계시'에 맡겨버린 채 말이다. 왜일까?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은 더욱 커져만 갈 텐데 왜 그토록 미래를 찾기보단 현재의 삶에 집착하고 과거에 얽매이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 등이 꿈꾸는 자들의 미래를 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에 질려 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때문에 자신의 꿈을 처참히 살해당한 자들은 무력하게 과거만을 회상하며 현재의 삶을 지연시킨다. '아! 아름다웠던 옛날이여……'라고 울부짖는 그들의 탄식. 미래를 향해 그칠 줄 모르며 질주할 수 있는 '용기'는 이미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에 짓눌렸다.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 이라고 외칠 용기는 질식당한 지 오래. 하지만 살아 있다면, 움직이는 자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움직이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어떤 변이의 가능성도 봉쇄되었을 때,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면 '차이 없는 반복'을 일삼는 자들은 분명 죽은 자들, 죽음을 부러들이는 자들이다. 오시이 마모루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작가이다.
『공각기동대』를 기억하는가? 그는 이 영화에서 인간의 정체성조차 고정되어서는 안되며 끊임없이 변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은 이렇게 희망을 말한다. “자, 어디로 갈까……. 네트는 광대해…….” 하지만 쿠사나기 소령의 밝은 미소는 우리를 잠깐, 아주 잠깐 동안 안심하게 만들 뿐이다. 『공각기동대』의 끝은 긑이 아니라 시작이다. 미완의 완성. 삶을 위한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고 밖으로 뛰쳐나가려 하자 바로 그 순간,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것이 발견된다. 그녀의 말마따나 네트는 광대하다. 정말, 너무나 터무니없을 정도로 광대하다.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는 네트워크. “네트는 광대해” 하고 말하는 동시에 찾아온 정보의 바다에 무의미하게 떠 있는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거대한 두려움이 계속해서 발목을 잡고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공각기동대』이후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는『공각기동대』에서 보여줬던 자신의 희망을 '허무'에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바론에 대한 비평들은 대개가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가상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 영하를 제대로 분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깨어졌던 조각상이 후반부에 완전한 모습이 되고, 사라진 개가 포스터 안에 들어가 있고, 현실이라고 믿고 있던 공간에서 보여지는 몇 번이고 반복되는 사진보다 더 움직임 없는 사람들의 모습 등등은 무엇이 현실이고 가상인지 말할 수 없게끔 만든다.
영화는 오히려 클래스 A, 클래스 리얼, 현실, 이 모두가 하나의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는 “이 많은 세계들 중 어떤 것이 현실인가”를 묻기보다, “이 세계들이 어떻게 각각의 현실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그 현실의 세계는 미래로부터 어떻게 현재로 옮겨졌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영화는 그들 중 긍정해야 할 세계와 부정해야 할 세계는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혀실과 가상을 혼동하지 마라. 여기가 바로 너의 필드다” 라고 말이다.
--- pp.186~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