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장수는 앞줄에 앉은 우리 어린애들 중 하필이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 먼저 이 아이를 일본 사무라이로 만들어보겠습니다.”
이후 유년 시절의 기억은 약장수가 걸쳐준 하오리와 일본 삿갓과 함께 떠올랐다. 약장수가 내 몸에 걸쳐준 하오리는 너무 컸고, 나의 머리에 들씌워준 일본 삿갓은 머리를 짓누르며 세상을 캄캄하게 했다. 일제강점기란 이와 같이 우리 몸에 맞지 않은 옷이었으며 우리의 시야를 가려 드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한 일본 삿갓 같았다.
--- p.35
난 자리에 누워서 한글 까막눈을 깨치고 이제부터 학교에 가서 정말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학교에 가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쥐수염 선생은 일본인 요시다 선생으로 바뀌어 있었다. 교실에는 일장기와 나란히 노기 대장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김만철 반장이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는데 ‘차렷, 경례’ 대신에 ‘기오쯔케, 케이레이’ 하자 모두들 절을 하며 ‘곤니치와’ 하는 게 아닌가. 난 우리 학교로 온 게 아니라 일본의 어느 학교로 잘못 전학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그란 콧수염에 동그란 먹테 안경을 쓰고 가운데 가르마를 탄 요시다 선생은 옆구리에 깉 닛뽄도를 차 한껏 위엄을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두렵기보다 ‘방정맞고 경망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시다 선생은 나를 불러 ‘국어상용’이란 도장이 찍힌 종이 10장을 주면서 일방적으로 일본어로 말했다.
“이것이 국어상용표다. 너가 조선어를 한 번 할 때마다 반아이들이 이 종이를 한 장씩 빼앗을 것이다. 물론 다른 애들이 조선어를 하면 너도 종이를 빼앗을 수 있다. 토요일 검사해서 열 장에서 모자라는 장 수만큼 손바닥을 맞는다, 알겠나?”
--- pp.107-108
요시다 선생은 자신이 식민지 교육자임을 잊지 않았다. 요시다 선생에게는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몇 가지 교육원칙이 있었다.
첫째, 조선인을 천황의 충량한 신민으로 만든다.
둘째, 거짓말은 용납되지 않는다. 셋째, 더러운 것은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조선인의 특징은 천황에게 불경하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며, 몸에는 더러운 냄새가 나기 때문에 ‘동조동근’, ‘내선일체’가 안 된다. 요시다 선생은 우리들에게 창씨개명의 선봉대가 되라고 명령했다. 요시다 선생과 백순사의 닦달과 협박으로 사람들은 죽지 못해 창씨개명을 했다.
이풍호가 학교에서 새롭게 달아준 창씨개명 이름표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제기랄, 난 기노가와 후꼬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똥꼬라 해라.”
“안 그래도 서러운데 덕갱이 너마저 놀릴기가? 방앗간 김열삼이는 ‘가네다’이고, 윤끝주는 ‘이토’가 됐다. 니는 우짤기고?”
“나는 성을 갈면 성을 간다고 안 하더나.”
끝까지 경주 김씨로 버티던 우리 집에 어느 날 시라가와로 이름을 바꾼 백순사가 쓰리쿼터를 타고 나타났다.
“만약 다음 주까지 창씨개명하지 않으면 흰 종이가 날아갈 것이다.”
흰 종이는 노무징용 소집장이었다. 몸이 약한 아버지에게 흰 종이는 눈에 흙이 들어오는 죽음을 의미했다. 백순사가 다녀간 뒤 우리 경주 김씨는 ‘가네카와’로 성을 갈았다. 나의 가슴에도 ‘가네카와 도케이’라는 서러운 식민지 백성의 딱지를 붙이고 말았다.
--- pp.114-121
“김덕경 불합격!”
난 밤새 목욕을 하고 왔는데도 오히려 ‘거름통’에서 ‘똥통’으로 한 단계 더 격하시킨 것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요시다 선생은 더러움을 조선인의 민족적 특성으로 보았다. 그 중에서도 가난한 조선인에게서는 더욱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약장수가 나에게 씌운 일본 삿갓과 같았다. 선생님이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한 난 죽어도 용의검사를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의 냄새를 당당하게 풍기며 다니리라.
--- p.144
우리 학교에서는 ‘가미카제’ 혹은 ‘요카렌’라고 불리는 자살특공대를 뽑고 있었다. 군가를 우렁차게 부르고 걸핏하면 후배들에게 똥바가지를 뒤집어씌우고 기합을 주던 ‘똥박’ 선배와 두 명의 학생이 학교 배속장교의 권위로 가미카제에 지원했다.
대원들이 떠나는 그날, 학교는 종돈장에서 돼지를 한 마리 잡아 잔치를 열었다. 우리는 연병장에 나와 모자를 벗어 흔들며 자살특공대를 보내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주먹을 부르쥐고 군가를 부르던 똥박 선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흑흑’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그러자 우리들도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 pp.206-207
일제강점기 때 군국주의 교육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학교 전체가 병영이었고, 선생은 교관이었다. 우리는 식민지 소년으로서 우리말과 우리이름을 빼앗긴 채, 배고픔과 가난과 열등감에 시달리며 자라났다. 일장기를 흔들며 일본 군가를 부르던 유년시절은 부끄러워서 나의 인생에서 삭제하고 싶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식민지 소년의 시절도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