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연극사는 연극이야말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가장 인간적인 예술이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몸으로 하는 연극이야말로 생명을 위하여 환경을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설정해야 할 의무를 지녔기 때문일 터다. 여기에 문화의 주된 상징인 언어가 덧보태지는데,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규정되고 사회적 산물인 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연극은 삶의 근원보다는 덩치 큰 이익을 추구한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빠져 다른 생명체, 생태계의 권리를 무시한다. 극장은 너무 화려하거나 너무 초라하고, 무대는 조악하고, 공연의 내용들은 새로운 것이 많지 않다. 연극도 변함 없고, 연극하는 이들도 다르지 않고, 연극 동네의 풍경도 늘 그렇고 그렇다. 기이한 것은 연극할 이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공연은 그런 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지원금이나 후원금을 받을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일까? '연극'이 아니라 동숭동을 비롯한 한국 연극의 서식지가 참으로 기이하다.
오늘날 공연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빠른 속도로 노래하고 춤추는, 승자독식을 경영 원칙으로 삼는 뮤지컬이 아닌가?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생태계와 분리시켜 고립과 긴장의 체계 속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런 연극들은 신경증적 강박을 관객들에게 호소한다. 예컨대 거의 모든 작품들은 인간의 억압과 정신적 소외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하면서 상투적으로 억압과 소외를 갉아먹고 있다. “신비한 암호가 고스란히 오므린채 기다리고 있는”(휘트먼,「풀잎」) 자연과 생태 환경의 중요성을 알리려는 작품은 많지 않다.
연극이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을 수 있을까? 인간은 지구의 거주자가 아니라 방문자라는 입장을 지니도록 할 수는 없을까? 인간이 있는 곳에 연극이 있다면, 연극은 인간과 삶, 그 터전인 땅과 환경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술에 위계가 있다면 몸으로 하는 연극이야말로 생명을 위하여 환경을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설정해야 할 의무를 크게 지녔을 것이다. 인류의 연극사는 연극을 삶과 만나는 가장 인간적인 예술이라고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국 연극은 연극에 대한 기표와 기의가 따로 논다. 연극에 대한 욕망은 커지지만 연극을 만드는 이들의 삶의 물질적 근거는 변함이 없다. 연극에 대한 언어가 연극하는 이들의 의식만 팽창시키고 확대시켰을 뿐이다. 그 끝은 분명한 자기 소멸이다.
언어가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올 때 기표가 완전히 기의와 결별하는 것처럼, 연극과 연극하는 이들의 실제적 삶 사이에는 근본적인 균열이 생긴다. 떠올리기 싫지만 그 끝은 무섭다. 공연된 연극들은 무너진 기표가 되고, 연극하는 이들은 맹목적으로 연극을 일삼는 자동 기계 장치로 전락하는 것이 아닐까. 공부하고 싶었던 젊은이들이 뜯어먹혀 황폐화되어간 이 동네는 언제가지 지속될 것인가? 한국 연극도 연극에 관한 생태 윤리를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연극을 보전하고 연극인들이 개입할 수 있는 연극과 삶과 환경에 대한 윤리가 시급하다.
비유로 토끼 이야기부터 하자. 남미에서는 오존 구멍을 통화한 강한 자외선에 노출된 탓으로 장님이 되어버린 토기들이 수백 마리씩 들판을 해매고 있다고 한다. 두드러지는 피해자는 사람이 아닌 토끼들이므로, 사람들은 이 사실을 거의 땅에 묻어두거나 기억하려 들지 않는다. 세계에서 공기 오염이 가장 심각한 곳은 한국ㆍ멕시코ㆍ중국이라는 세계보건기구의 보고를 기억하자. 이들 세 나라의 오염은 단순히 자국에 끼치는 나쁜 영향을 넘어 지구촌 모두를 위협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백화점들의 세일 기간에 도시를 가로지르는 큰 길과 뒷길들이 모두 복잡해지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줄곧 있어온 일로, 모두들 물건을 사러 백화점에 모여드어 아수라장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물건을 싸게 구입하는 일이 삶의 즐거움이라는 태도는 장님이 된 토끼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백화점에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집과 극장은 텅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세상이 삶이 거주하는 집이라면, 극장은 연극이 거주하는 집이다. 하여 작가와 작품들은 세상과 극장을 동일시하고, 삶과 연극을 서로 견주어 비유하곤 했다. 장님이 된 토끼 이야기는 분명 우리 삶의 위기를 말해준다. 문제는 그것을 위기라고 여기지 않는 태도다. 이러한 생태계의 위기는 예술의 위기, 생명의 위기와 직결된다. 논란 대상이 되었던, 고속철이 옛 도시인 경주의 중심을 관통할 것인가, 우회할 것인가, 땅속으로 다니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 역시 문화재를 보호하고 건설에 따른 자연과 생명의 피해를 줄이고자 함일 터다.
--- pp.208~211
무명의 시대, 무명의 연극에 이어 연극이라는 이름이 생겨나는 시대가 이어졌다. 연극이라고 할 수 있는 기존의 것과 함께, 그것을 연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름과 함께. 유명의 시대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서 사물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사유체계를 수립하고 이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세계를 조직하고 키워왔다. 그리하여 이성적 인간만의, 이성적 인간만에 의한, 이성적 인간만을 위한 자연 지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유명의 시대, 유명이 연극을 가능하게 한 것은 조명 때문일 것이다.
조명은 자연의 파괴를 상징하는, 아니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유명의 시대가 내세우는 과학 기술의 산물이다. 그것이 연극으로 들어오면서 연극을 밤낮없이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오히려 장소와 때를 소외시킬 수밖에 없었다.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되고, 이곳이 금세 저곳이 되고, 저곳이 금세 이곳이 되는 조명의 마술 앞에서 연극은 확대되었지만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공 조명으로 인하여 하늘아래 어둠을 밝히는 달빛과 계절을 잃어버렸다. 관객과 배우들은 무대 뒤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망각하게 되었다. 곧 바람을 피할 수 있었지만 몸은 오히려 얼어붙었다.
조명으로 연극은 관객들에게 가릴 것과 보여줄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무대 위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은 환하게 비춰주지만 숨기고 싶은 것은 조명을 낮추거나 꺼버려 컴컴하게 가려버린다. 연출 일 가운데 하나가 조명을 조정해서 관객들에게 보여줄 것을 선별하는 것이다. 조명에 앞서, 연극을 하는 이들이 무대에서 하는 모든 것은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조명의 활용은 무엇보다도 보여주고 싶은 것 가운데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기보다는 보여주고 싶은 것 가운데 들어 있는 보여져서는 안 되는 것을 감추는 기능을 발휘한다.
유명은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기도하지만 사물과 사물의 경계를 구분하는 배타적인 일이기도 했다. 이렇듯 유명은 망각을 낳고 그것은 교육에 의해서 다시 굳어진다. 메이어홀드처럼 “교육적 허구”를 내세워 연극 학교를 부정하는 이들의 입장은 학교가 오히려 자연의지배와 더불어 연극의 면모를 제거해버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학교와 선생이 반성하는 것은 학생들의 그것보다 훨씬 어렵고 드물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배우가 뒤를 잇는다. 배우는 배排와 우優가 합쳐진 글자다. 배는 비극을연기하는 이를, 우는 희극을 연기하는 이를 뜻한다. 배排는 아닐 비非와 사람人이 합쳐진 글자다. 비는 설해 문자에 따르면 날아가는 새의 두 날개의 모습에서 따온 상형자다. 그래서 죄罪라는 글자도 새를 잡아두는 새장을 뜻한다. 새의 날개 모양이 나쁨을 뜻하는 대표적인 말이 된 이유는 새의 양 날개가 서로를 반목하고 어긋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하고서는 날아갈 수 없는 것이 날개의 속성이다. 고대인들은 이 어긋남, 반목의 속성을 최악이 것으로 보았다. 비극의 비悲는 어긋남非을 보는 마음心이다. 비극은 어긋남과 반목을 합친 연극이며, 배우는 어긋남과 반목을 연기하는 사람이다. 유명의 연극은 이때부터 커지기 시작했다. 작품에 이름이 붙고, 작품의 성격에 따라 작품이 놓일 자리가 구별되었다.
--- pp.97~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