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일본군 합동참모본부가 임진왜란이 정당한 전쟁이었음을 전제로 기술하여 편찬한 『일본전사 조선역』의 기록을 보면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일본군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였고, 엄청나게 많은 일본군이 전투 중에 사망한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전사 조선역』에 따르면, 1592년 4월 조선에 파견된 일본군이 1번대에서 9번대까지 15만 8,700명이고, 수군은 4,500명으로 1차로 침략한 일본군은 16만 3,200명이다. 이들 병력 이외에 조선에서 전투를 벌인 기록이 확실한 일본군은 모두 22만 4,774명이다. 그런데 1년 2개월이 지난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공격을 위해 편재된 일본군은 9만 3,000명, 부산과 거제도에 주둔하고 있던 예비 병력을 합하면 12만 1,578명이다. 일본군 참전 병력이 지휘관 별로 되어 있고 병력수가 시기별로 꼼꼼하게 적혀있는 것을 정리해보면, 제2차 진주성전투가 벌어지기 이전까지 일본군 22만 4,774명 중에서 12만 1,578명이 살아남았고 10만 4,196명이 사망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일본군 사망자 중에서 1593년 1월 평양성에서 이여송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에 의해 사망한 일본군은 1,500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순수하게 조선 관군 및 의병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일본군이 1년 2개월 동안 10만 명이 넘는다는 결론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임진왜란에 대한 새로운 증거와 맥을 같이 하는 또 다른 증거를 제시하면서 임진왜란에 대한 우리 역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진주성 전투 전사자 157명 중 107명이 호남출신」중에서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몰려갈 당시 조선군은 진주성 수성과 공성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진주성을 비우자는 공성론을 주장한 주요 인물은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권율, 의병장 곽재우 등이다. 관군을 담당하고 있던 도원수와 순찰사는 조명연합군의 실질적인 작전권을 행사하였던 명나라 군대의 입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대의명분 상 조선을 돕기 위해 파병된 명군과 군사작전 상의 갈등을 빚는 것은 빠른 전쟁종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진주성에 도착한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의 명에 의해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자신의 병력을 빼서 한양 방향으로 향했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조선관군은 2차 진주성전투에 합류하지 않았고, 진주성을 응원하기 위해 진주성으로 향하던 선거이는 관군을 이끌고 함양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반해, 진주성 수성을 주장한 사람은 국왕이었던 선조,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이다. 국왕 선조를 제외한 이들은 조선군으로서의 관직은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의병장 출신이다. 이들이 지휘한 병력은 대부분이 의병으로 조직되어 있어 각자 독자적인 부대 지휘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군의 전략에 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을 비롯한 진주성 주둔군과 인근 지역 및 전라도에서 진주성 방어를 위해 자발적으로 진주성에 들어온 관군과 의병이 일본군 침략에 대비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김해 부사 이종인, 사천 현감 장윤, 거제 현령 김준민 등이 진주성에 들어갔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 의병장 고종후, 태인의병장 민여운 등이 합세하였고, 충청도 지역에서는 충청병사 황진, 해미현감 김명세, 태안현감 윤구수, 당진현감 송제, 보령현감 이의정 등이 합류했다.
진주성을 방어하기 위한 진주 수성군은 관군 3,000명과 의병 2,800명 전체 5,8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2,800명의 의병 중에서 관군은 사천현감이 이끄는 200명이고, 나머지 2,500명은 의병이다. 그리고 2,500명의 의병 중에서 충청도 병력은 황진 충청병사가 이끄는 700명이고, 나머지 1,800명은 전라도 의병으로 추정된다. ---「2차 진주성전투에서의 호남 관군과 의병」중에서
임진왜란에 대해 한국인은 조선의 갈등과 분열로 인식하고 있다. 갈등과 분열에 의해 전쟁을 대비하지 못하고, 이에 따라 각종 전투에서 지속적으로 패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분열과 갈등의 국가였다면 국란을 극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호남 관군과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특히 경상도 지역으로 원정을 와서 사투를 벌이다 목숨을 바친 사실은 임진왜란을 겪던 시절 모든 조선군과 백성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지역을 넘어 출전하는 등 국가통합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갈등과 분열이 아니라 통합과 희생의 역사였던 것이다.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라도 출신 의병장과 충청도 의병장들이 지역 의병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였고, 결국 모두 전사했다.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는 일본군 9만여 명이 몰려오고 있기에 전투에서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지역, 타지역을 가리지 않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 각지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진주성 전투를 사실상 끝까지 지휘하다 전사한 창의사 김천일은 나주 출신이며, 김천일과 함께 전사한 경상우병사 최경회는 화순 출신이고, 충청병사 황진은 남원 출신이며, 복수의병장 고종후는 장흥 출신이고, 태인의병장 민여운은 태인 출신이며, 도탄의병장 강희보는 광양 출신이다. 그리고 양산숙은 나주 출신이고, 황대중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강진 출신이다.
특히 지금까지 밝혀진 제2차 진주성 전사자 신원 중에서 전라도 출신 관군과 의병의 비율은 타지역 출신에 비해 매우 높다. 즉 157명의 전사자 명단 중에서 출신지역이 밝혀지지 않은 17명을 제외한 140명의 75%가 넘는 107명이 전라도 출신이다.
한마디로 임진왜란 시 각종 전투에서 기본적으로 지역 주둔군 및 의병이 일본군을 맞이하여 전투를 벌였지만, 필요할 때에는 타지역으로 원정하여 전투를 벌였고, 관군과 의병 상호간에 긴밀한 협력을 유지했다. 즉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은 지역갈등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 지역이 위급할 때에는 다른 지역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전투에 참여하였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호남 출신 전사자가 특히 많은 것은 이러한 의미를 반영한다.
---「호남 관군과 의병 전사자의 의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