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의 유산. 괜찮은 말인 듯하나, 이미 돌아다녀 본 미국의 대통령기념관 전시 중에 ‘레거시(유산)’라는 말이 안 들어간 곳은 없었다. 너도나도 ‘레거시’다. 하지만 현지에서 흔했건 그렇지 않았건 그 질문은 우리에게 또한 핵심과도 같았다.
노무현의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기념관의 콘셉트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거기엔 인간 노무현의 길도, 시민 노무현의 길도, 정치인 노무현의 길도 있을 것이다. 나눠서 혹은 통합해서 보여 줄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궤적이 가지는 철학, 가치, 유산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응축하는 한 문장, 한 단어까지 밀고 간다면 그게 콘셉트가 될까. 여러 문장, 여러 단어를 늘어놓고 하나하나 빼내다 보면 마지막 남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니면 그 모두를 포함하거나 관통하는 키워드를 만날 수 있을까.
--- p.19-20
『노동문학』 기고 이후 18년이 흐른 2007년 가을, 오마이뉴스 오연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퇴임을 6개월여 앞둔 시점이었다.
“나는 20년 정치 생애에서 여러 번 패배했지만, 한 번도 패배주의에 빠진 일은 없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에게 주어진 암울한 상황을 그렇게 받아들였을까. 무려 4선이라는 긴 재임 기간을 통해 결국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관련기사에 따르면 제45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2015년 민주당 경선 과정에도 ‘루스벨트 적자(嫡子) 공방’이 벌어졌다 하니 미국에서 루스벨트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인정받는 모양이다.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밑바탕에도 그러한 가치가 관통한다. 칼럼에서 전해지는 솔직한 좌절과 회의,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신념과 희망 같은 것 말이다.
--- p.36~37
링컨 대통령기념관은 150년 전 대통령과 만나는 현대적인 방식을 보여 주었고, 특히 아이들에게 역사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유의미한 사례였다. 이미 역사가 된 인물이기에 가능한 일이고 또 필요한 접근이었을 것 같다. 민주주의, 국민통합, 정부 혹은 국가의 역할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 등 노무현 대통령이 품은 가치 또한 링컨 대통령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개인적으로 우리 아이들, 후대를 생각하며 멀리 본다면 링컨 대통령기념관 방식이 타당하겠다 싶다. 그런데 지금부터 그렇게 멀리 봐야 할까. 동시대의 어떤 세대를 염두에 둬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을까.
궁금하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노무현이라는 대통령이 있었다’. 당신이라면 누구에게 먼저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지 말이다.
--- p.77
또 하나의 장면은 워싱턴 D.C.에 위치한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의 작은 홍보관이다. 익숙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사진도 눈에 띄었다. 링컨 기념관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사건의 사진들로 벽면을 장식했다. 흑인 인권운동 등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자유의 궤적’으로 불러도 좋을 만큼 자유와 인권의 가치가 세기를 넘어 이어져 왔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자체가 성공과 성취의 궤적은 아닐 수 있으나, 저렇게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성공과 성취를 내세우는 것보다 더 부러웠다. 그 또한 ‘있는 그대로’가 가지는 의의이기도 하리라.
그런 관점과 태도가 꼭 대통령 재임 시기 공과에 대한 평가의 용도에 그칠 사안은 아니다. 대통령 노무현, 사람 노무현을 만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통로가 있을까.
--- p.163-166
부시 대통령기념관은 더 근사하게 만들어 놨다.
9·11 테러와 연계한 자유의 수호(Defending Freedom) 전시관의 한 코너다. 영화에 등장하는 상황실 같았다. 터치하는 대로 화면이 열리고 영상이 보이고 문서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부시정부 입장에서 ‘테러 집단’, ‘위험 국가’들의 현황과 실상, 관련 자료들을 일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니 관람객들이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다.
‘기술’하면 링컨 대통령기념관(Abraham Lincoln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이 다시 떠오른다. ‘너무 나갔다’, ‘한참 부족하다’ 등 노예해방을 둘러싼 두 진영의 극단적인 주장이 통로 양측에 홀로그램으로 떴다. 통로를 지나면 그 속에서 고뇌하는 링컨의 모습이 등장했다.
여기서 거론한 부시 대통령, 링컨 대통령의 전시는 모두 자유, 해방이라는 보편의 가치를 내건다. 둘 다 최신 기술을 통해 전시를 구현했다. 하지만 부시의 가치와 링컨의 가치에 대해 동의하는 정도는 세계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차이가 나지 않겠는가. 신기술을 접목할 때 가치든 사건이든 구현하고자 하는 주제에 따라 해당 전시가 가지는 울림 또한 다를 것이다
우리가 최신 기술을 도입한다면, 노무현의 무엇을 보여 주기 위해 그래야 할까. 관람객들을 모을 볼거리 용도도 나쁘지 않다. 노무현의 어떤 가치를 구현하는 수단으로도 좋다. 하지만 중요한 건 기술 앞에 어떤 노무현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인지, 노무현의 무엇을 보여 주기 위해서인지 그 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p.210-214
미국 대통령기념관의 기부는 대부분 ‘큰손’들로 이루어졌다. 노무현재단은 다르다. 2015년 후원금을 달러로 환산하면 540만 달러 정도가 된다. 관계자 미팅 자리에서 “노무현재단 은 매달 1만 원 이상 후원하는 회원이 4만2,000명이고 후원금은 연간 540만 달러에 달한다”고 소개하면 다들 놀라워하는 분위기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인 봉하마을의 연간 방문객이 평균 70만 명 안팎이라고 하면 그런 반응의 정도는 더해진다. 앞 대목에서 방문객이 가장 많은 레이건 대통령기념관이 연간 35만 명 안팎―관련 기사에 따르면 최고기록은 38 만 명―이라고 했다. 링컨 탄생 200주년이었던 2009년 링컨 기념관에는 전 세계 110개국에서 60만 명이 다녀갔다고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미국의 기념관 관계자들에게도 우리의 경우는 유례없는, 혹은 아주 드문 사례일 것이었다.
--- p.254-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