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게 누구여?”
문을 연 고 여사가 입을 쩍 벌리면서 주대홍을 바라보았다. 부스스한 머리에 헐렁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얼굴은 주름투성이였고 허리는 더 굽어 있었다.
“웬일이여, 이렇게 아침에?”
그러면서 주대홍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에이구, 고맙기도 해라.”
그러면서 그의 옷깃을 잡아 집 안으로 끄는 고 여사는 그의 일식집 스승이었던 박광선의 부인이었다. 그는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마당을 지나 미닫이문 앞에 섰다.
“얘, 미정아. 주 총각 왔다.”
방 안을 향해 그렇게 소리친 고 여사가 온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주대홍을 돌아보았다.
“아직 장가 안 들었지?”
그때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박미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버지를 닮아 둥근 얼굴형에 콧날이 가늘고 입술이 얇은 박미정은 그를 향해 머리를 꾸벅 숙였다.
“오빠 오셨어요.”
“오늘 회사 안 나가?”
“회사가 망해서 그만두었어.”
고 여사가 대신 대답하였으므로 박미정은 문에 기대서서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주대홍은 좁은 툇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봉천동의 산비탈에 임시로 지은 집이어서 벽과 담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전에 박광선을 따라 방 안에 들어가 앉았던 주대홍은 벽에 등을 기대었다가 질색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의 무게에 눌린 벽이 무너질 것같이 흔들렸던 것이다.
방 한 칸에 부엌과 마당을 합해 열 평이 못 되는 주택이었는데 박광선이 살아 있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찾아왔었다. 박광선이 그를 데려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사는 언지 합니까?”
그가 묻자 고 여사가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당에 박힌 수도꼭지에서 함지박 속으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보상금을 1천5백만 원밖에 안 준다는데, 그걸 가지고 전세를 얻기도 힘들고, 월세를 내려면……”
“엄마.”
뒤쪽에 서 있던 박미정이 낮게 소리치자 고 여사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박미정은 무남독녀로 이제 고 여사와 둘이 살고 있는 것이다.
“미정이 너는 어떻게 헐래? 취직혀야지?”
몸을 돌려 그가 묻자 박미정이 머리를 끄덕였다. 긴 머리를 뒤에서 틀어 올려 묶은 탓에 긴 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어서인지 여위어 보였다.
“몇 군데 부탁을 해두었어요. 그러니 다음 달에는…….”
“참, 자네, 아침은 먹었어?”
생각난 듯 고 여사가 물으며 일어섰다.
“반찬은 없지만 밥은 있는데, 줄까?”
“예, 주세요.”
그러자 고 여사는 만족한 표정이 되어 부엌으로 들어갔다.
“오빠는 일 잘되세요?”
박미정이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그려. 근데 너는?”
“예, 뭐가요?”
“…….”
“작년에 헤어졌어요.”
퍼뜩 머리를 든 주대홍이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박미정에게는 애인이 있었다. 박광선이 주대홍과 맺어주려는 눈치를 보이자 그녀는 심하게 반발하였는데 언젠가는 제약 회사에 다닌다는 그 사내를 주대홍에게 보여준 적도 있었다. 아마 주대홍이 집에 온 날을 맞추어 그를 불렀을 것이다.
“그걸 물어본 것이 아녀.”
허리를 굽혀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고 앉은 주대홍이 말했다.
“그런 건 중요한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요. 중요한 일이 아녜요.”
박미정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빠를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나두 너를 봐서 좋다.”
부엌에서 도마에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 주대홍은 퍼뜩 머리를 들었다. 저만큼 익숙한 솜씨로 고 여사가 칼질을 하고 있는 것을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늦은 아침을 얻어먹은 주대홍이 상을 물리고 나서 고 여사와 마주 앉았다. 단칸방이어서 박미정은 위쪽의 경대에 등을 대고 앉아 비스듬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은 사모님한티 드릴 것이 있어서.”
주대홍이 들고 왔던 비닐 가방을 방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선생님허고 지가 10년쯤 전에 적금을 들었습니다. 그런디 그것이 엊그제 만기가 되어서.”
모녀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에 지가 계속 적금을 부었지요. 2억짜리였응게로 여그 반으로 갈라 1억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모녀의 시선이 비닐 가방에 꽃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저, 그러면 저는 이만.”
“잠깐만요.”
일어서는 주대홍을 향해 입을 연 것은 박미정이다. 그녀는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빠, 정말이에요?”
“그럼 저 가방에 종이가 들어 있을라구.”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적금을 부었다는 말.”
“내가 거짓말허는 사람이냐?”
넋을 잃은 표정으로 가방을 바라보던 고 여사가 머리를 들었다.
“주 총각, 거기 좀 앉게.”
“저는 바쁩니다. 일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자네, 적금 통장이 있나? 보여주게.”
“인자 필요 없어서 버렸는디요.”
“오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왜들 이러시는지 모르겠구만.”
주대홍이 혀를 찼다.
“나헌티 왜 이러십니까? 2억을 모두 가져와야 혔는디 1억은 빚진 것을 갚았어요. 그리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주대홍은 서둘러 신발을 신었다.
“그럼 사모님, 안녕히 계십시오. 그러고 미정이 너도.”
“이보게, 이보게.”
펄쩍 뛰어 일어난 고 여사가 그를 불렀다.
“오빠, 나 좀 봐요.”
박미정도 따라 불렀으나 그는 한걸음에 문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좁은 골목을 뛰어 내려가면서 찌푸린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고덕균이라면 보다 매끄럽게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것은 그에게는 빼앗을 때보다 열 배는 더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