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 20분. 김포 주둔 제5공수여단의 군수참모 안형규 중령은 웃음 띤 얼굴로 앞에 서 있는 김수남 대위를 바라보았다.
“하긴 부산의 깡패들이 시끄럽게 했다고 해서 내 천금 같은 휴가를 반납하면 안 되겠지. 그렇지 않나, 김 대위?”
“참모장님 마음 변하시기 전에 얼른 출발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참모님.”
김 대위도 웃는 얼굴이다.
“이러다가 지난번처럼 비상으로 잡히시면 야단 아닙니까?”
“이번에는 안 돼.”
안형규의 말투는 단호했다.
“비상이고 지랄이고, 난 간다.”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하계 훈련을 지원하러 나가는 대신 4일간의 휴가원을 내었으나 두 달이나 미루어졌다. 그러다가 지난달에 겨우 참모장의 결재를 받고 났을 때 비상 훈련이 발동되었던 것이다.
김 대위가 사무실을 나가자 안형규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휴가는 오늘부터 계산되었기에 지금도 휴가 기간을 사무실에서 까먹고 있는 셈이다. 안형규는 모자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난여름부터 벼르고 있던 아내와의 제주도 여행은 2박 3일의 일정이 될 것이다. 이제까지 제주도 구경을 못 했다고 틈만 나면 한탄하던 아내는 조금 전에 전화를 받고 이미 준비를 끝내 놓았을 터였다. 애들은 장모가 돌보아 줄 것이고, 비행기표는 여행사에 다니는 처남이 생색을 내며 건네줄 것이다. 아내는 두 달 전부터 여행비를 마련해 두어서 자신은 몸만 가면 되었다. 그는 오랜만에 들뜬 기분이 되어 사무실을 나왔다.
12시 30분. 연천 북방의 제24사단 수색중대 제3소대장 고정만
중위가 벙커 안에서 막 점심을 먹은 시간이다. ROTC 출신으로 제대가 3개월 남은 터라 그는 틈만 나면 내년 2월에 있을 입사 시험 공부를 했다. 오늘도 그는 영어 교재를 들고 벙커에서 나와 옆쪽의 능선으로 다가갔다. 그가 언제나 앉는 곳은 아래쪽의 계곡과 건너편의 북한군 벙커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능선의 양지 쪽이다.
마른 나뭇잎이 쌓여 푹신한 땅바닥에 앉은 고 중위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건너편 산등성이에 있는 아직 지지 않은 몇 그루의 단풍나무가 상처 자국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한 달 전만 해도 저쪽의 산은 붉은 단풍에 덮여 오히려 몇 그루의 침엽수가 붉은 피부의 딱지처럼 보였다.
그는 점심 후의 흡연을 즐기듯이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문득 아버지가 술이 늘었다는 어머니의 편지 내용이 떠올랐으므로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현대중공업의 용접공으로 일하시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다리 불구가 된 것은 그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회사에서는 보상금과 자녀들 학비를 지원하고, 고정만이 원하면 그룹의 어느 회사에든 무시험으로 입사시키겠다는 약속도 해주었다.
그러나 고정만은 당당히 입사 시험을 치르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대학의 전공이 기계 공학이었으므로 지망도 아버지가 일하던 현대중공업이다.
그는 땅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영어 교재를 펼쳤다. 나뭇잎 한 개가 바람에 날아와 그의 다리 위에 떨어졌다. 아래쪽 계곡에서 이름 모를 산새가 울다가 그쳤다. 그리고 고정만은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 쇳소리는 길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자신의 온몸이 섬광에 싸여 하
늘 위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김재선이 안보수석 오병탁으로부터 연천 북방의 전방 초소들이 포격을 당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12시 40분이었으니 보고는 신속한 편이었다. 일반 절차상으로는 수십 군데를 거쳐야 되는 일이었지만 북한의 도발 행위에 대해서는 중간 절차를 과감히 생략하는 체계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야단났어. 이건 노골적인 도발이야. 우리 초소에 포격을 하고 있단 말이야.”
대통령이 점심 식사 중이어서 우선 연락을 넣고 난 오병탁은 앉지도 않고 서성대다가 곧 불려 들어갔다.
“이것, 악재가 겹치는 것 아냐?”
대기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농수산수석 변성길이 물었으나 김재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은 신호탄인 것이다. 어쩌면 스타트라인의 총소리로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10분쯤 지났을 때 김재선은 대통령에게 불려 들어갔다. 집무실에는 비서실장과 안보수석이 긴장한 모습으로 대통령 앞에 앉아 있었다.
“이봐, 김 수석.”
역시 굳은 표정의 대통령이 김재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북한이 도발을 하고 있다는데, 연천 북방의 그 몇 사단이라고?”
“24사단입니다, 각하. 사단장은…….”
대통령이 오병탁의 말을 잘랐다.
“전방의 벙커가 날아가고 소대장 이하 다섯 명이 죽었다는데.”
그는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머리를 눌렀다.
“오 수석, 전화로 현재 상황은 어떤가 알아봐요.”
“예, 각하.”
벌떡 일어선 오병탁이 옆쪽의 전화기로 다가가자 대통령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분단된 지 50년 가까이 되어서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각하, 포격은 그쳤다고 합니다.”
오병탁이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참모총장인가?”
“예, 각하.”
“이리 바꿔요.”
대통령이 참모총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이윽고 대통령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포격은 그쳤지만 우리 국군의 피해는 사망 7명에 부상 15명이야. 1개 소대 병력의 대부분이 당했다는군. 조준 포격이라는 거야.”
“…….”
“그래서 내가 전군에 비상 경계령을 내렸어. 한미연합사령관에게도 연락을 하라고 했고.”
집무실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대통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실장, 국방장관을 부르도록. 여기에서 상황을 지휘해야 할 테니까.”
대통령이 끝났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자 세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집무실의 문을 막 열고 한 실장이 먼저 나갔을 때다.
“김 수석, 잠깐만 나 좀 봐.”
대통령의 목소리에 얼굴이 굳은 오병탁을 내보낸 김재선은 문을 닫았다. 그는 대통령의 앞으로 돌아와 섰다.
“정상회담 제의 원고는 준비되었겠지?”
대통령의 물음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준비되었습니다, 각하.”
“포를 쏘다니, 너무 심한 것 아닌가?”
“그쯤 되어야만……. 왜냐하면 요즘은 내부 문제가 너무 시끄러워서요, 각하.”
“…….”
“모든 언론사가 이 사실을 즉각 보도하도록 하겠습니다, 각하.”
“그래야지.”
“아마 오후쯤 되면 저쪽에서 오발이었다는 해명 성명이 발표될 것입니다, 각하.”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회담 제의는 내일 아침에 특별 성명으로 발표하시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각하.”
“그렇게 하지.”
다시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남북이 손발을 맞추는 건 50년 만에 처음이군. 그렇지 않나?”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