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떡 몸을 일으킨 제레미는 도대체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아내려 머리를 쥐어짰다.
‘일 년 전? 내 생일? 그럼 난 지금 살아 있다는 건가? 그런데 왜 지난 일 년 동안에 벌어진 일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걸까?’
황당무계한 의문들이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말도 안 되는 해답과 가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그의 이성은 차츰 흐릿해져갔다. 생뚱맞은 상황을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어진 제레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다음 목덜미를 신경질적으로 문질러대며 마음을 다잡아보려 애썼다. 그런 그의 귀에 빅토리아가 샤워를 하며 『사랑의 찬가』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p.18
빅토리아가 그의 집을 찾아왔을 때 목도했을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가운데 혀에 위스키 맛이 감돌았다. 그는 누군가를 부르려 했지만 목소리는 목에 걸린 채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비상벨을 찾아보았지만 그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눈앞이 침침해졌다. 그는 눈이 완전히 감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써 눈을 부릅떴다. 그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물리쳤다.
‘지금은 안 돼! 이제야 살아갈 이유를 찾았는데!’--- p.38
시편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는데도 굳을 대로 굳은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주울 수가 없었다. 빅토리아가 부엌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녀를 소리쳐 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맴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누군가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창에 빛이 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땀에 흠뻑 젖은 채 온 몸이 마비되었다. 그가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건 두 눈동자뿐이었다. 그는 숨을 들이쉬려고, 단 몇 초라도 더 깨어 있으려고 애면글면했다. 그러다 문득 예의 노인이 창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노인은 여전히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읊조리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도대체 저 노인은 누굴까? 빅토리아에게 알려야 해! 미친 노인네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고!’
빅토리아에게 알려야 해! 알려야 해! 그는 빅토리아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잠시 숨이 막혀 컥컥거리던 그는 이윽고 빛을 버리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p.83
‘저 아이들은 내 자식들이야. 그리고 나는 저 아이들을 사랑해. 하지만 어떤 식으로 사랑하는 걸까? 언젠가 어떤 종교지도자가 한 말이 생각나. 남자에겐 참된 인간으로 거듭날 기회가 세 번 주어진다고 했어. 첫 번째 기회는 부모님의 사랑과 도움인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경우 아내의 도움으로 경박하고 이기적이고 미숙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지. 그 기회마저 놓치면 자식들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다고 했어. 그래도 안 되면…… 더 이상은 희망이 없다고 했는데……. 나는 어쩌다 그 기회들을 모두 놓쳐버린 걸까? 어쩌다 식구들의 사랑을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을까? --- p.131
끔찍한 몰골, 그 자체였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고,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였다.
‘이제 뭘 더 바라겠어? 침대에 붙박인 노인네가 돼버린 거야.’
자신의 몸속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그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려 애써보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제2의 제레미란 놈을 이긴 건 아닐까? 그놈을 이렇게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로 몰아넣었잖아. 그래, 내가 이긴 거야. 불편한 것쯤이야 얼마든지 참아내고말고.’--- p.247
나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거야, 빅토리아. 내 삶은 한낱 구덩이에 불과했어. 빛을 집어 삼키는 구덩이, 시커먼 구덩이 말이야. 긴긴 터널 같았다고나 할까. 드문드문, 아주 드문드문 구멍이 뚫려 있었어. 그 새로 빠져나오면 오월의 햇살이, 따스한 산들바람이 나를 반겨주었지. 물론 다시 삶 없는 시커먼 굴속으로 빨려 들어가야 했지만 말이야. 그 속엔 나도 없고 당신도 없었어. 죽음 앞에선 자신이 살아온 이유를 떳떳하게 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무의 세계에서 충만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나는 죽음 앞에서 뭘 더 바랄 수 있을까? 며칠 더 살게 해 달라고? 지나온 삶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앞으로 다가올 삶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날들을 더 달라고?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 빅토리아.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나는 아직도 그 시절에 머물러 있으니.’--- p.265
아브라함 크리코비치 랍비는 그 시선에 압도당했다. 그리하여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제레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제레미 형제님, 제 생각에…… 형제님은 2001년 5월 8일에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의 몸은 별안간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브라함 크리코비치 랍비의 목소리만 계속해서 들려올 뿐.
“형제님은 2001년 5월 8일에 죽었습니다. 또한 스스로 저지른 잘못을 깨닫는 그 하루가 끝날 때에도 죽었지요.
삶은 우리네 인간으로서는 그 가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풍요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지지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보는 셈입니다. 얼마나 많은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는지! 그러하기에 스스로를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최악의 선택은…… 우리네 인간은 그 길로 빠져들기 쉽지요…… 선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 것, 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 p.273
‘두 번째 기회는 없는 거야?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지? 이제 깨달았는데! 잘못을 깨닫게 해놓고 고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어떡해? 이게 바로 지옥인가? 아브라함 크리코비치 랍비가 말한 바로 그 지옥? 안 돼, 이럴 순 없어. 난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내가 지금 악몽을 꾸고 있나? 깨어날 수 있는 건가? 내겐 아직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그는 저 아래, 빛 속에 자리하고 있을 신에게 애원했다. 용서해달라고.
‘그래, 나는 신을 모욕했어! 그래, 나는 부모님을, 아내를, 아이들을 괴롭혔어! 하지만 이젠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어!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 괴로운 마음을. 살고픈, 나만의 삶을 만들어가고픈, 식구들을 행복하게 해주고픈 이 강렬한 욕구를. 식구들은 나를 용서해주겠지. 자살하기 전의 제레미를. 하지만 신은?’
시편의 뜯겨나간 부분에 새겨져 있던 글귀들이 그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그의 기억에서 뜯겨나가 뒤죽박죽으로 뒤엉켜버린 글귀들. 그는 비명을 질렀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