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고려인 문학사 개관
1. 서 언
CIS 고려인 CIS 고려인은 ‘재소 한인’ ‘고려사람’ ‘조선사람’ 등으로도 불리는데, 고려인들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ㆍ카자흐스탄ㆍ우즈베키스탄 등 CIS에 거주하는 한인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고려사람’을 사용하고 있으며, ‘고려인’은 한국에서 널리 사용되는 호칭이다. 이 책에서는 ‘재소 한인’ ‘고려인’을 같은 개념으로 병용한다. 오늘날 CIS 고려인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그 하나는 주로 함경도 북부지방에서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건너온 이주자들의 후손으로, 수적으로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2∼5세대들이며, ‘고려사람’이라 불린다.
다음은 사할린 한인으로, 이들은 1939년부터 1945년 광복 직전까지 사할린 남부지역 광산의 강제 사역에 동원되었던 한인들 중 일본 패망 후 사할린에 잔류한 한인(4만7천여 명)의 1∼3세대이며, 현재 3만5천여 명에 달한다. 끝으로, 유학 또는 계약 취업 후 귀국하지 않고 소련에 남거나 월경 이주 후 영주권을 획득한 탈북 한인으로, 한국어를 매우 유창히 구사한다는 점에서 고려인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이들은 수적으로 가장 미미하며, ‘재소 한인’으로 불리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 게르만, 고려사람-러시아 제국, 소비에트유니언,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의 한인들, 나는 고려사람이다, 국학자료원, 2013. 참조.
의 러시아 이주는 1864년 1월 14가구 65명의 조선인들이 러시아 극동 남(南)우수리스크 지역으로 이민하면서 시작, 그 이주역사가 150여 년에 이른다. 첫 이주민은 그해 1월 러시아 정부의 이주 허가를 받아 한겨울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한 13세대의 농민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이전부터 봄에 블라디보스토크나 우수리스크 지역으로 건너가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다시 귀향하는 조선인들의 ‘품팔이꾼’으로서의 계절적 이주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점차 정착 이주로 바뀌면서 이주민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불어난다. 변경의 사정이 이에 이르자, 조선 정부는 1867년 유민(流民) 방지 계엄책을 제정하여 그들을 무력으로 저지하려 한다.
하지만 기근과 봉건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에 지쳐 괴나리봇짐을 싼 조선인들의 생계 문제와 당시 시베리아 개발에 노동력이 필요했던 러시아 정부의 이해가 일치, 조선 정부의 유민 방지책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 이주는 해가 갈수록 늘어난다. 그리하여 조선과 러시아의 통상조약이 체결된 1888년에는 그 수가 이미 1만 명을 훌쩍 넘어서게 되고, 1910년의 ‘경술국치’ 이후 더욱 급증하여 1917년에는 이주 조선인의 수가 8만5천 명에 이르고, 1919년의 3ㆍ1 독립운동 이후 더욱 본격화된다.
연해주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유민(流民)이라는 자신들의 현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지를 만들고, 민족적 차별과 핍박 등 각양의 시련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극복하며 서서히 생활의 기반을 마련해 나간다. 러시아 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는 경제부흥을 위하여 연해주의 조선인촌을 집단농장 ‘콜호스’(kolkhoz)로 건설하기로 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이 무렵, 적지 않은 이주 조선인들은 조국 해방을 앞당기기 위해 러시아 ‘10월 혁명’을 지지, 러시아 ‘붉은 군대’(적군파)와 연대하여 러시아 백군파 및 이와 연합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고, 소련의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이바지한다. 그리고 1922년, 패배한 일본이 연해주 지역에서 철수하자, 이주 조선인들은 연해주를 새로운 ‘고향’으로 여기며 ‘콜호스’를 중심으로 정착한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 정권은 집단농장 계획을 철회하고 소수민족에 대한 분리 차별 정책을 시행, 그해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에 걸쳐 연해주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스탈린의 무자비한 이주정책으로 인해 조선인(고려인)들은 그 어떤 사전 통보도 없이 하루아침에 그 동안 일궈온 생활터전에서 강제로 추방당한다. 스탈린 정권은 고려인들의 반발을 없애기 위해 조명희 등 고려인 사회의 지도급 인사 2천5백여 명을 반혁명분자나 간첩이란 혐의를 씌워 “자의적으로 체포하고 처형”한 후, 18만여 명의 연해주 지역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김 게르만, 위의 책, 179-181쪽 참조. 이에 따르면, 1922년 일본군이 극동지방에서 철수한 직후 러시아 공산당은 이 지역 조선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계획을 세웠는데, 이주 조선인사회가 강력히 반발하고 이주에 따르는 사회ㆍ경제적 여건이 불충분하여 곧바로 집행하지 못하고, 1937년 당초 계획한 대로 실행했다고 한다.
CIS 고려인 이주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으로 지적되는 이 강제이주는 단순히 주거지를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바꿔놓은 것뿐만 아니라, 고려인들의 운명을 바꿔놓게 된다. 이 강제이주로 인해 고려인은 조국, 즉 조선으로의 귀향의 꿈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고, 연해주, 즉 원동(遠東)을 새로운 정신적 고향으로 삼게 된다.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는 3개월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당시 18여 명이던 이주민 중에서 1만1천여 명이 도중에 숨지고, 구사일생으로 도착한 사람들도 허허벌판에서 또다시 굶주림과 추위에 죽어갔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집단농장을 경영하는 등 독립국가연합(CIS) 내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잘사는 민족으로 뿌리를 내린다. 현재 CIS 지역에 산재하여 거주하는 고려인은, 재외동포재단의 통계에 의하면, 2015년 12월 현재 약 56만 명에 달하는데, 1937년 강제이주 결과 이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1937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당한 세대와 그들의 후손, 옛 소련에 유학하거나 외교관 등으로 거주하다가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정착한 북한 출신, 2차 대전 때 사할린에 징용자로 끌려갔다가 1970년대 초 이주해온 경우 등 세 부류로 구성되어 있다.
CIS 고려인은 비슷한 시기에 간도로 이주한 중국조선족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인다. CIS 고려인들은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당하고, 뒤이어 공민권이 박탈되고 민족어 사용마저 금지된다. 이후 1986년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개혁)ㆍ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에 힘입어 문화적 해빙기를 맞이하게 되기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이들은 모국과의 접점을 상실한 채 살아왔고, 이 지역 고려인문학 또한 모국문학과 거의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문학은 대부분 외형적으로 그간의 한국문학과는 친연성(親緣性)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조선족 문학이나 재일조선인 문학과도 많은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CIS 고려인들은 ‘소련 인민의 소비에트인화’를 중심정책으로 강요해온 스탈린 시대와 이후 소련의 정치 사회적 상황 때문에, 그리고 한글 교육 단절과 공민권 박탈 등의 문제로 인하여 독자적인 고려인문단과 함께 직업적이고 전문적인 작가층마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다. 물론 선봉(1923~1937)→레닌기치(1938~1991)→고려일보(1991~현재)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고려인 신문의 문예면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이 이루어지고, 작품집 또한 이들 신문사 출판부를 중심으로 간행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양적인 면에서는 중국조선족 문단이나 재일 한인사회에 비해 열악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CIS 고려인들의 삶이 고난과 인고의 역사였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_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