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청년의 이야기
이 세상에 삶을 누리게 된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뜻있는 인생을 보내야 한다. 비관이나 절망은 인생에 대한 모욕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뜻있는 인생을 보낼 수가 있을까? 이 문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 이 책을 쓰려고 하는 것이다. 그날그날이 재미가 없어서 기가 죽어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더라도 하루 종일 잇달아서 생각하는 것이 끊이지 않고, 그 때문에 아깝게도 즐거워해야 할 일생을 충분히 즐거워할 수 없는 세간 일반의 남녀에게, 심리학적 입장에서 가장 유효적절한 해결책을 주어 새로운 생활의 지침을 보여 주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먼저 나는 다음의 것을 자명의 이치, 부동의 철칙이라고 단언하여 마지 않는다. 즉 어느 정도의 통찰력과 이해력으로 인생의 근본 문제를 구명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당장 삶의 기쁨을 발견하여, 이제는 실의의 끝에 순무처럼 퍼렇게 시들거나 짐승처럼 굶주려 헛헛하며 지내는 일은 없이, 자기가 자기 자신의 주재자가 되어 일생을 통해서 인생에 예술적 향기조차 더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지만, 세상에는 우리의 지식이나 능력을 가지고도 어떻게도 하기 어려운 문제나 곤란사가 있다. 이러한 것은 운명의 신만이 아시는 일이지만, 이 경우에도 그러한 나쁜 운명 아래 있는 울분이나 고뇌는 그 대부분을 줄이는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꼭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고 싶은 것이다.
나는 언뜻 보기에 거의 해결의 방도가 없다고 생각되는 극히 곤란한 인생의 여러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주 맞붙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임상정신병의사로서의 다년간의 체험에서 보면, 지금까지 무정 냉혹한 운명의 장난으로서 불만스러우나 어쩔 수 없이 단념하고 있던 여러 가지 곤란사나 어려운 문제는 실은 협동 정신에 대한 무지 내지 결여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인생의 행복은 운명의 신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라는 진리를 나는 해가 갈수록 점점 굳게 믿게 되었다.
참으로 셰익스피어도 말하지 않았는가? “가엾은 브루투스여, 실패는 운명의 신의 장난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한 소행이다.”라고. 나는 이 책의 각장에 걸쳐 모든 인간의 불행을 운명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손에서 탈취하여 그 운명의 신을 그 본래 있어야 할 곳에 바꿔 놓자, 즉 운명의 신을 여러분 각자의 자유로운 구사(驅使)에 맡기자 하고 시도할 작정이다. 여기에 하나의 실지 예를 보기로 하자.
어느 날, 나의 진찰실로 존이라는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의 병은 만성불면증이었다. 그는 2년 동안이나 한시도 잠을 자지 못하여, 자기가 인생 행로의 낙오자가 된 원인은 어떤 약을 먹어도 잠을 자지 못하여 결국 운명의 신이 그에게 자연의 수면을 주지 않은 데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존은 어렸을 때부터 앞길의 대망(大望)에 불타고 있었다. 법률을 공부하여 장래는 변호사가 되고 같은 변호사 중에서도 제일인자가 되려고 결심하였다. 학교의 성적은 대단히 좋았는데, 거기에는 아들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던 양친이 돈으로 살 수 있는 한 최상의 교육을 해 주려고 하여 전적으로 아낌없이 돈을 쓴 것도 한몫 힘이 있었다. 그는 중학에서 대학까지 수석으로 통하고 미래의 성공에 희망의 눈동자를 빛내면서 한 사람의 변호사로서 찬란하게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이리하여 양친의 원조도 있어 성공의 희망에 불타고 있는 동안에는 만사가 잘 되어 갔다.
그런데, 다른 어떤 직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학교의 성적을 가지고 실사회에 있어서의 실무의 성적을 다루기에는 왕왕 맞지 않는 것이다. 이 젊은이도 막상 정말로 실사회에 나와 보니, 학교 시절에는 온갖 장애를 극복해 왔건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여기저기의 대학이나 여러 가지 사회에서 나온 선발된 사람들과 경쟁하는 처지에 놓인 것을 우선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 그때 그의 이 최초의 당혹을 틈타듯이 그의 양친이 잇달아 이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지금까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깊이 양친에게 의뢰심을 가지고 있었던만큼 양친의 죽음은 그에게 아주 견딜 수 없는 심한 타격이었다.
인생의 출발점에서 벌써 두 가지 커다란 충격을 마음에 받고 그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앞길은 갑자기 캄캄해졌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가 이미 인생의 낙오자가 된 것이라고 부지불식간에 믿게 되고, 그것을 또 당연한 일인 것처럼 믿어 버리게 되었다. 이 예기치 않았던 곤혹의 상태에 직면하여 그는 생애의 최대 위기에 서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밤에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의사가 주는 약 정도로는 물론 적당한 수면을 취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과연 강렬한 마약은 억지로라도 사람을 잠으로 끌어넣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만 결코 충분한 휴양을 하도록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수면제의 작용이 사라지면 겁에 질린 듯이 눈뜨고, 또 수면제가 잠을 자게 해 주고 있는 동안에도 두뇌만은 확실히 활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마침내 자기의 불면증을 운명의 신의 지시라고 돌려 버리게 되었다. 그 후의 그의 생활 태도는 세간 일반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음의 법칙에 얽매이는 것이다.
“밤에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는 나에게 어떻게 낮 동안의 만족한 일을 기대할 수 있는가? 나 자신의 힘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어떤 명의에게 진찰을 받아도 낫지 않을 완고한 육체적 질환이라는 커다란 핸디캡을 가진 내가 어떻게 하여 일에서 수많은 경쟁 상대와 실력 대결을 할 수 있겠는가?”
밤마다 존은 침대 위에 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려고 애태우면 애태울수록 두뇌는 더욱더 맑아져 가는 것이었다. 불면증인 사람은 누구나 이렇다.
그러나 사실은 불면증 환자라고 해도 대개는 충분히 자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자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은 의학상 전혀 불가능한 일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일찍이 어떤 유명한 작가가 수면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의 전혀 무용한 사치품에 불과하다고 하는 의견을 내세웠다. 그는 일생 동안에 대단히 많은 일을 성취하려고 결심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엄격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먼저 수면 시간의 단축을 시도하였다. 맨 처음 그는 수면 시간을 여덟 시간에서 일곱 시간으로 줄이고 다음으로 일곱 시간에서 여섯 시간으로, 여섯 시간에서 다섯 시간으로, 다섯 시간에서 네 시간으로 점점 떨어뜨려 갔다. 거기까지는 만사 별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나 네 시간으로 떨어뜨리고 세 시간으로 줄이고 다시 두 시간으로까지 단축하기에 이르자 드디어 자연이 항의를 발하였다.
이 작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수면 시간의 최소 한도를 두 시간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정한 일에 아직 손도 대기 전에 그는 마음도 몸도 지쳐 녹초가 되어 버려서 다시 원래의 기운을 되돌리기 위해 꼭 1년 동안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야만 되었다.
이와 아주 비슷한 실지 예를 다시 두세 가지 들고 청년 존 군을 향하여, “자네가 한 잠도 자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다만 자기가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인 것이다. 게다가 자기의 현재 실의의 상태를 상상 속에서 꾸며 낸 불운이라는 작은 악마 탓으로 돌려 버리고, 심기일전(心機一轉)의 기회를 만드는 데에 마음을 쓰는 것은 제쳐놓고 오직 관념상의 운명이라는 작은 악마를 끙끙거리며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하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는 벌써 갱생의 서광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법률 사무에 종사하는 대신에 불면증의 원인을 만드는 일에만 일심으로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억울한 죄명이라고 크게 쓴 표찰을 목에 걸고, 게다가 또한 자기를 진짜 죄인이라고 믿고, 또 체념하고 있는 사람의 심리 상태 속에 부지불식간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심리적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 청년 존은 자기의 과도한 야심이야말로 사실은 불면증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를 향해서 사람은 타인의 친절한 조언에 의해서 얼마나 격려받는지 모른다는 것을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사실 실사회에 있어서는 우리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조언이나 격려를 하여 주는 타인이란 것은 그다지 좀처럼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척척 마음먹은 대로 순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 예기치 않은 행복도 자주 찾아오는 것이지만, 예기치 않은 행운을 기대하고 지내는 일은 내가 아는 한 비참한 생활로 들어가는 가장 확실한 제일보이다.
좋은 생활의 설계도는 각인 각자가 그려야 한다. 인생의 무대에서는 우리들은 당구처럼 요행수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또 구경꾼의 박수갈채를 미리 요구할 수도 없다. 하물며 굉장한 행운의 기회가 방문을 노크하는 것이나 행운의 신이 미소를 던져 주는 때가 오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서는 더군다나 안 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