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물은 동체는 말과 비슷하지만, 머리는 수사슴, 꼬리는 멧돼지에 가깝다. 둔직한 울음소리를 내고, 검은 뿔 하나가 이마의 정중앙에 삼 피트정도 튀어나와 있다. 이 동물은 산 채로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회자되고 있다.' 그것에 비해서 중국의 일각수는 이런식.
'이 동물은 사슴의 목을 하고 있고, 소의 꼬리와 말의 발굽을 지닌다. 이마에 튀어나온 짧은 뿔은 살로 되어 있다. 가죽은 등 부분은다섯 색깔이 있고, 배 부분은 갈색이든지 황색이다.'
--- '그것에 비하면 중국의 일각수는 연기가 좋은 성스러운 동물이에요. 이것은 용, 봉황, 거북 등과 나란히 4대 상서로운 짐승의 하나고, 삼백육십오 종의 지상에서 사는 동물 중에서는 가장 상위에 속해요. 성격은 아주 온화하고, 걸을 때도 아무리 보잘것없는 생명일지라도 밟지 않도록 유의 하고, 살아 있는 풀은 먹지 않고, 마른 풀만 먹어요. 수명은 약 일천 년으로, 이 일각수의 출현은 성왕의 탄생을 의미해요.예를 들면 공자의 어머니가 그를 회임하였을때, 일각수를 보았다고 해요.
(신기하죠?? 이게 일각수래요)
--- p.151-152
언제나 그렇다. 풀숲 속의 토끼를 좇듯 자신 안의 본능을 좇아가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괴로움으로 뒤범벅이 된 아이디어가 퐁 하고 튀어나온다. 이것을 놓치지 않고 꽉 움쳐쥐는 것이야말로 소설을 쓰는 하나의 비결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그 두 가지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연결시키면 좋을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손을 움직여 가며 고민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일단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쓰기 시작했다. 때문에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이야기와 '세계의 끝'이라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만나서 합쳐질까 하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그야말로 수수께끼였다.
물론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아마도 이러이러한 느낌일 거라는 막연한 아이디어는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가닥이 잡힌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나 스스로조차 그 이야기의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기 위해 계속 이 소설을 써내려간 것이다. 행여나 그것이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연결되지 않는다면 하는 불안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는 나 자신의 상상력과 행운을 믿고 있었다. 이러한 말투가 오만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소설가란 그러한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오만한 법이다.
짧은 시간에 집중력을 가지고 글을 쓰는 나지만, 이번에는 의외로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름에 쓰기 시작하여 전부 완성한 것이 다음해 1월, 퇴고까지 완성한 것이 3월 초였다. 그 동안에도 나는 언제나처럼 이사를 했다. 치바(千葉)에서 후지사와(?澤)로 옮겼다. 임대 주택이지만 어쨌든 1백 평이나 되는, 도심에서 뚝 떨어진 넓은 집으로 화장실이 세 개나 되었다. 거기의 가장 안쪽에 있는 한적한 일본 전통식 방에서 나는 끊임없이 작업을 했다.
이사에 관계된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이 번거로울 때는, 야쓰가타케(八ヒ岳)의 호텔이나 미우라(三浦)에 있는 신초샤의 바닷가 별장에 틀어박혀 작업을 계속했다. 두 가지 이야기를 병행해서 진행하는 작업은 힘겹기도 했고 또한 즐겁기도 했다. 두 가지 줄거리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 확실히 수월치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는 두 이야기를 번갈아 써내려가는 것은, 그야말로 오른쪽 뇌와 왼쪽 뇌를 나누어 사용하는 것처럼 기분 전환이 되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세계의 끝' 쪽(즉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 부분)은 처음 시작이 좋지 않은 이야기로, 이것을 올바른 궤도에 올려놓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에 비하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시작부터 발걸음이 가볍다. 그 두 가지를 잘 부둥켜 안아 가며, 가령 열 단계가 필요하다면 그 가운데 적어도 세 단계까지는 해내고 싶다. dfleks rm 정도까지만 진행되면 가속도가 붙어 그 다음은 매우 자연스럽게--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소설이 흘러가지 않을까?
나는 그러한 예측을 하면서 작업을 해나갔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내가 여태까지 써왔던 여섯 권의 장편소설 가운데, 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완전히 지쳐 버렸다. 자신이 원래 가진 실력보다 한 단계 정도 높게 설정해 놓은 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만큼 지금 다시 읽어 보면 '이거야 맙소사' 싶은 부분도 수없이 눈에 띈다. 그러나 새삼 말할 것도 없이 인생이란 자신의 입맛에 쓰고 달고를 떠나서,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과거사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 쓰고 난 다음에는 정말로 가슴이 후련했다. 탈고를 한 것은 때마침 나의 서른여섯 번째 생일날 저녁이어서 그야말로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것을 아내에게 읽어 보라고 했더니, 후반부를 전부 다시 고쳐 쓰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화가 나서 한동안은 입도 열지 않은 기억이 난다.
그래도 어쨋든--흠이 잡힌 것은 다시 고쳐 쓴다는 것이 나의 기본 방침이기 때문에--후반부는 전부 고쳐 썼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다섯 번인가 여섯 번을 고쳤다.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나와 그림자가 마지막에 어떻게 될까 하는 결말 부분의 처리는 고쳐 쓸 때마다 한결같이 달라졌다. 일반적으로 마지막 부분으로 접어들 무렵에는 그 결말이 머릿속에 정리되어 오는 게 보통이지만, 이 소설은 전혀 예외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할지 결단이 서지 않았다. 웅덩이 앞으로 나와 그림자가 도망가는 부분까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지만,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은 전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주인공 '나'와 똑같은 평면에서 마지막까지 망설이며 괴로워했다. 내가 홀로 숲에 남는다는 선택은 고투에 고투를 거듭하다가 끝에 가서야 가까스로 나온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 이외의 결말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제목은 출판사 쪽의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인지. '세계의 끝'만으로 어떻게 안 되겠느냐는 의뢰가 몇 번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러는 편이 좀더 문학적이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두 가지 이야기가 나란히 전개되는 점이 그 특색이라면 특색이므로, '세계의 끝'만으로는 제목으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의뢰는 사양했다. 또한 이 작품이 영문판으로 번역되었을 때(이 원고를 쓰고 있는시점에서는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 쪽 출판사로부터 책 제목을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만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완전히 정반대의 의뢰가 있었다. 이것도 물론 똑같은 취지로 사양했다. 새삼스럽게 생각건대 세상은 정말 각양 각색이다.
나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해서 전작이라는 방식으로 장편소설을 쓰게 되었다. 이것은 《양을 둘러싼 모험》의 월보에도 쓴 이야기지만, 한번 잡지에 소설을 연재하고, 그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책으로 낼 필연성이--적어도 나에게는--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작이라는 작업을 해보고 나서 느낀 것은, 우선 첫째로 이 방식이 역시 나에게 맞는다는 점이다. 원고 기한도 없고,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작업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나는 앞으로도 전작이라는 형식으로 장편소설을 써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한 것은, 장편의 전작을 써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은 주변의 지반이나 유통 경로 따위를 충분히 잘 다지고 나서가 아니면 힘들다는 점이다. 장기간의 레이스로 신경을 요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두지 않으면 사소한 실수로 다소 번거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나는 이 소설을 시종일관 긴장감을 가지고 써내려갔고, 쓰는 동안에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또 다 쓰고 난 후에는 어떤 느낌도 전해져 왔다. 그 느낌, 뭔가를 손에 쥐었다는 그 감촉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 몸 속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작품으로서의 완성도와 반드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다시 읽어 보면, 이 작품은 오히려 좀더 높은 완성도를 요구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이 안고 있던 '의미 있는 실패작'이란 상처를 여전히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이 작품을 쓰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미완성성은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의 미완성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작품을 다시 한번 고쳐 쓰고 싶지는 않다. 이 작품은 이미 여기서 끝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 가령 그 소설의 존속을 건 싸움터에서는 이 미완성마저도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고단샤>(講淡社)의
--- 무라카미 하루키 '내 작품을 말한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