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다룬 연구 주제는 도시의 형성 문제, 인구 문제, 도시 구조와 도시 문제, 도시민의 생업과 도시 문화, 국가의 도시민 지배 방식인 역제(役制)의 변화, 도시 행정 체제의 변화, 그리고 도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상업과 시장 문제, 그리고 도시 공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 서울과 런던에 대한 비교 연구다. 각장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론인 1장은 도시의 개념과 도시사 연구 방법, 그리고 그동안 서울 연구의 시기별 경향과 조선시대 서울 연구의 성과를 조선초기 서울의 형성, 조선후기 서울의 변화, 개항 이후 서울의 근대적 변모와 식민지적 왜곡을 중심으로 살펴본 글이다.
2장은 한양 형성의 사상적 배경과 도시 주민의 구성을 논한 것인데, 풍수도참사상이 한양을 조선왕조의 서울로 정한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음이 그간의 통설로 자리잡았는데, 저자는 한양의 건설 과정이 태조의 定都 단계에서 입안된 도시 계획이 일사분란하게 실현된 것이 아니라, 태조의 정도와 천도, 태종의 환도, 세종의 도시 정비라는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한양이 건설되었기 때문에 각 단계의 한양 건설의 사상적 배경은 크게 달랐음을 논증하였다. 아울러 새로운 왕조의 도읍의 주민들은 어떠한 성격을 지닌 자들인지에 대해서 중세사회의 차별적 지배 원리가 신분적 차별 외에도 공간적 차별이 동시에 가해지고 있음을 한양 초기 주민의 성격을 통해 살펴보았다.
3장은 현재 남아있는 다양한 호구통계 자료와 연대기에 기록된 인구 추세에 대한 자료를 근거로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말기까지의 인구 추세를 검토한 것이다. 그동안 역사인구학자들은 조선왕조가 남긴 호구통계 자료의 기록만을 근거로 17세기 이후 서울의 인구 추세가 큰 변동 없이 정체된 상태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인구에 대한 각종 서술기록과 호구단자류 등 보조적인 인구 자료를 활용하여 17세기 후반 서울의 인구는 20만에서 18세기 후반에 30만 이상으로 증가했음을 논증하였다.
4장은 30만 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는 서울의 도시 구조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18세기 서울은 상가가 크게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 공간 또한 성 밖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18세기 후반 서울의 인구 중 성 밖 거주 인구는 전체 서울 인구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구 집중으로 인해 18세기 서울에는 주택 문제, 산지 개간으로 인해 잦은 홍수와 같은 환경 문제, 도시 빈민 문제, 각종 범죄의 만연 등 다양한 도시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5장에서는 30만 명 가까운 서울 주민들이 어떻게 생계를 이어가고, 도시화된 서울의 저자거리의 문화는 어떤 것인지를 살폈다. 시전상인과 공인 외에도 서울 주민의 대부분은 한강변에서 배에서 상품을 하역하는 데 동원되어 품을 팔거나, 겨울철 한강이 얼었을 때 얼음을 채취하여 빙고에 저장하는 데 동원되어 품을 팔아 먹고사는 사람처럼 상업과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와 같이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서울의 도시 문화도 과거와 크게 달랐다. 특히 기술직 중인을 중핵으로 하는 여항인들이 출현하여 당시 서울의 지배층이었던 경화사족(京華士族)과는 다른 문화를 영위해갔다. 이들에 의해 영위된 도시 문화는 강상윤리에 매몰되지 않고, 성욕 등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는 것이었다. 이들에 의해 향유된 도시 문화는 유흥의 상업화 경향을 촉진하여 자신이 지닌 재능을 팔고 사는 층들도 생겨났다. 특히 이 장에는 일반독자들의 읽을거리가 풍성한 부분이기도 하다.
6장에서는 서울 주민들에게 부과된 장빙역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폐지되고,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영업 분야로 전환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장빙역은 방역(坊役)의 일종으로 한성부 주민과 중앙 각사의 전복들이 겨울철 얼음을 채취하여 빙고에 저장하는 역(役)이었다. 무상으로 노동력을 징발하여 운영되던 장빙역은 17세기 후반 물납세로 전환되었고, 18세기 중엽에는 최종적으로 역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빙계(氷契)에 의해 영업의 한 분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빙계의 장빙업 독점은 민간 장빙업자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18세기 최말기에 해체되고, 장빙영업은 민간 장빙업자들의 자유로운 영업 분야로 정착하였다.
7장은 한성부-오부-방-리로 편성되었던 조선전기 한성부의 행정 체제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한성부-오부-방-계라는 행정 체제로 변동하였는지를 살핀 글이다. 특히 조선후기에 새로 등장하는 계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가 이 글의 최대 관심사였다. 계는 원래 인적 결사로서 동질한 주민 집단을 묶어 한성부에서 부과하는 방역을 응하는 조직으로 출현하였고, 계의 설치와 폐지 또한 왕의 재가를 얻어야만 가능한 공식성을 지닌 행정 단위로 기능하였다. 특히 동질적 주민 집단은 거주 공간의 동일성을 전제로 묶였기 때문에, 계는 한성부의 공식적인 행정 단위로 편성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신분과 직역에 따라 차별적으로 지배되었던 한성부 주민들은 중세적인 坊民에서 점차 균등한 의무와 권리가 주어지는 시민으로 전화할 수 있는 하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8장은 조선후기 서울의 도시 공간이 어떠한 원리에 의해 구분되고, 서울 공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지를 살핀 글이다. 조선시대 서울의 공간은 도성을 기준으로 도성 안과 성저십리로 구분되었고, 행정적 구분으로 오부(五部)와 방(坊 ), 거주민의 특성에 따라 북촌과 남촌, 중촌, 상촌(上村)과 하촌(下村)으로 구분되었으며, 도성 밖 변두리 지역을 연강(沿江)과 산저(山底)로 구분하기도 했다. 한편 고지도에서 나타난 조선 사람들의 서울 공간에 대한 인식은 풍수적 명당이라는 공간 인식, 왕과 신하들이 거주하는 신성한 왕도(王都)라는 인식, 조선후기 상업 발달에 따라 교통과 상업 중심으로 공간을 인식하는 세 가지 인식 태도가 나타나고 있었다.
9장은 조선시대 서울의 시장과 상업을 살펴본 글이다. 조선전기 종로의 시전을 중심으로 한 상업 체제가 임란을 전후하여 크게 동요되었고, 17세기 후반을 계기로 점차 재편되면서 서울의 상가도 종로의 시전 외에 동대문 안쪽의 배오개시장과 남대문 밖의 칠패시장으로 확대되었으며, 시전 외에도 난전상인과 점포 상업, 그리고 경강변의 하역운수업과 장빙업 등 다양한 영업이 성행하는 상업도시로 그 성격이 변모하였음을 살펴보았다.
10장은 17, 18세기 서울의 도시 변화를 영국의 런던과 비교한 글이다. 이 시기는 두 도시가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는 시기로서, 인구의 집중, 도시 시설의 정비, 도시 문제의 발생 등 외양에서는 유사한 변동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런던이 당시 확대되고 있었던 세계 시장의 중심 도시로서의 위상을 지닌 것에 견주어 서울은 동아시아의 폐쇄적 왕조의 일국 수도로서의 위상을 지녔기 때문에 그 변화의 폭과 깊이는 크게 달랐다.
---본문 내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