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작전》에는 카메라가 제자리에서 도는 것같이 부감으로 찍은 나선형 계단이 있다. (혹은 양각으로 찍은 것은 아닐까?) 이 장면은 로베르 들로네의 그림의 색채 분할 기법을 연상시킨다. 공간감을 없애고 색채와 연합한 이런 회전 기법은 이 계단이 올라가는 계단인지 내려가는 계단인지를 반문하게 만든다. 이 이미지들은 시각적 추상화를 향한 유혹을 숨기고 있다. 앙토냉 아르토는 논문 <영화와 현실>(《족비와 성직자》의 시나리오보다 앞서 쓴 텍스트이다)에서 마리오 바바의이런 이미지와 '스토리의 극적 전개를 위한 것이든 아니든간에 이러한 심리적 테크닉을 구사한' 영화를 비난한다. 판타스틱한 심리적 테크닉을 극적 전개를 위해 구사한 영화나 그렇지 않은 영화, 그 사이에는 '진정한 영화를 향해 노력하는' 자리가 있다고 아르토는 말한다. '정신의 어두운 진실을 찾는' 영화, '사물들의 인간적인면, 현실의 진피'를 갖고 유희할 줄 아는 영화가 그런 영화이다. 충동적이 된 현실은 아이러니 속에서 스스로 파괴되는 것 같아진다. 거기서는 “정신의 극단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영화적 판타스틱은 매번 표현될 때마다 '진정한 영화를 향한 노력'을 재현한다. “즉 진정한 영화란 영화가 스스로로부터 해방될 때의 영화이고, 4차원에 도달하게 해주는 영화이다. 4차원, 즉 3차원의 재현이 문화로 녹아 전개되는 환상적 공간에 도달하게 해주는 영화”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피에르 르장드르는 또 덧붙인다: “그 점에서 영화와 신학은서로 일치한다.”
우리는 빅토르 에리체의 영화《빛의 꿈》을 그런 진정한 영화의 한 증거로 제시하고 싶다. 그 영화는 분명히 판타스틱 장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화적 환상성을 적절하고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영화 전체는 우리가 강의 흐름을 거역하듯이 거슬러 올라갈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회귀의 필요성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빅토르 에리체 영화의 움직임은 그런 사람들의 움직임이다.
영화는 화가 안토니오 로페스의 다큐멘터리로 시작한다. 로페스의 작업은 그의 그림의 테마인 야생 마르멜로 나무 열매처럼 소박하고 정확하다. 그리고 꿈이야기로 마무리되는데, 그것은 유년기가 다시 돌아오는 꿈이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영화의 마지막 순간으로부터 다시 출발해서 여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영화는 다시 시작되면서 끝나는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는 땅에 떨어져 썩어가는 마르멜로 열매들에 이어서 어린 새들처럼 솜털 보송보송한 싱싱한 과일 열매들이 나타난다.
영화는 따라서 이중의 결심, 자기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려는 화가의 의지와 이 사건을 필름에 담으려는 영화인의 의지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러나 또 영화는 호가가 3개월 전에 들었다던 꿈의이야기를 화가의 의지와 연관시키는 연출가 빅토르 에리체의 해석 행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꿈은 영화 끝에 자리하면서 동시에 영화보다 앞서 있다. 빅토르 에리체는 안토니오 로페스가 정확하고 고집스럽게 회화 작업에 몰두하는 이유, 그 알 수 없는 당위성을 단순 간결하게 영화에 담는다. 그리고 그는 로페스의 작업이 정당성이 있으며 또한 깊이가 있음을 암시해 간다. 결말에서 화가의 음성으로 마침내 꿈 이야기가 드러날 때, 화가는 상징적으로 죽어 있다. 이 부분의 연출은 아주 정교해서 마치 무덤 속에서 꿈 이야기가 울려 나오는 듯하다.
(…)
빅토르 에리체는 시간과의 싸움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선택한 것이다. 그의 영화는 시간에 대한 영화이다. 또한 영화와 회화의 힘과 한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질아이요가 화가 베르메르에게서 발견한 것을 되찾는다. 즉 지하 묘소나 어떤 비밀 같은 곳, 그러니까 떨어진 장소를 찾아내는 것이다: “단순한 직각의 기하로 떨어지는 빗줄기의 청명성은 일상적인 현실을 상징적인 것으로 만든다. '상징적' 이라는 단어는 그 고유한 의미로 '속에묻힌' '박힌' '각인된' '봉인된' 을 의미한다. 일상적인 현실의 이런 상징적인 면 속에 봉인된 것은 물질성과 정신성을 함께 회복한 통합, 분리되기 이전의 통합니다.”
기하학적인 엄밀성, 수정의 청명성은 쥘리앵 그라크가 '사물들의 저장고의 전지전능한 감정' 이라고 부르는 것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이 역행은 불안감 없이는 실행되지 않는다. 더욱이 쥘리앵 그라크는 '공포의 감정까지'도 수반된다고 말한다. 사실 그만큼 모순된 삼정들이 동시에 자극될 수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에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는 고뇌, 게다가 '공포 속에서 발생하는 모순된 대상' 까지도 보여 주었다.
--- pp.71~75
《공포 작전》에는 카메라가 제자리에서 도는 것같이 부감으로 찍은 나선형 계단이 있다. (혹은 양각으로 찍은 것은 아닐까?) 이 장면은 로베르 들로네의 그림의 색채 분할 기법을 연상시킨다. 공간감을 없애고 색채와 연합한 이런 회전 기법은 이 계단이 올라가는 계단인지 내려가는 계단인지를 반문하게 만든다. 이 이미지들은 시각적 추상화를 향한 유혹을 숨기고 있다. 앙토냉 아르토는 논문 <영화와 현실>(《족비와 성직자》의 시나리오보다 앞서 쓴 텍스트이다)에서 마리오 바바의이런 이미지와 '스토리의 극적 전개를 위한 것이든 아니든간에 이러한 심리적 테크닉을 구사한' 영화를 비난한다. 판타스틱한 심리적 테크닉을 극적 전개를 위해 구사한 영화나 그렇지 않은 영화, 그 사이에는 '진정한 영화를 향해 노력하는' 자리가 있다고 아르토는 말한다. '정신의 어두운 진실을 찾는' 영화, '사물들의 인간적인면, 현실의 진피'를 갖고 유희할 줄 아는 영화가 그런 영화이다. 충동적이 된 현실은 아이러니 속에서 스스로 파괴되는 것 같아진다. 거기서는 “정신의 극단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영화적 판타스틱은 매번 표현될 때마다 '진정한 영화를 향한 노력'을 재현한다. “즉 진정한 영화란 영화가 스스로로부터 해방될 때의 영화이고, 4차원에 도달하게 해주는 영화이다. 4차원, 즉 3차원의 재현이 문화로 녹아 전개되는 환상적 공간에 도달하게 해주는 영화”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피에르 르장드르는 또 덧붙인다: “그 점에서 영화와 신학은서로 일치한다.”
우리는 빅토르 에리체의 영화《빛의 꿈》을 그런 진정한 영화의 한 증거로 제시하고 싶다. 그 영화는 분명히 판타스틱 장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화적 환상성을 적절하고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영화 전체는 우리가 강의 흐름을 거역하듯이 거슬러 올라갈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회귀의 필요성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빅토르 에리체 영화의 움직임은 그런 사람들의 움직임이다.
영화는 화가 안토니오 로페스의 다큐멘터리로 시작한다. 로페스의 작업은 그의 그림의 테마인 야생 마르멜로 나무 열매처럼 소박하고 정확하다. 그리고 꿈이야기로 마무리되는데, 그것은 유년기가 다시 돌아오는 꿈이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영화의 마지막 순간으로부터 다시 출발해서 여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영화는 다시 시작되면서 끝나는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는 땅에 떨어져 썩어가는 마르멜로 열매들에 이어서 어린 새들처럼 솜털 보송보송한 싱싱한 과일 열매들이 나타난다.
영화는 따라서 이중의 결심, 자기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려는 화가의 의지와 이 사건을 필름에 담으려는 영화인의 의지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러나 또 영화는 호가가 3개월 전에 들었다던 꿈의이야기를 화가의 의지와 연관시키는 연출가 빅토르 에리체의 해석 행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꿈은 영화 끝에 자리하면서 동시에 영화보다 앞서 있다. 빅토르 에리체는 안토니오 로페스가 정확하고 고집스럽게 회화 작업에 몰두하는 이유, 그 알 수 없는 당위성을 단순 간결하게 영화에 담는다. 그리고 그는 로페스의 작업이 정당성이 있으며 또한 깊이가 있음을 암시해 간다. 결말에서 화가의 음성으로 마침내 꿈 이야기가 드러날 때, 화가는 상징적으로 죽어 있다. 이 부분의 연출은 아주 정교해서 마치 무덤 속에서 꿈 이야기가 울려 나오는 듯하다.
(…)
빅토르 에리체는 시간과의 싸움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선택한 것이다. 그의 영화는 시간에 대한 영화이다. 또한 영화와 회화의 힘과 한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질아이요가 화가 베르메르에게서 발견한 것을 되찾는다. 즉 지하 묘소나 어떤 비밀 같은 곳, 그러니까 떨어진 장소를 찾아내는 것이다: “단순한 직각의 기하로 떨어지는 빗줄기의 청명성은 일상적인 현실을 상징적인 것으로 만든다. '상징적' 이라는 단어는 그 고유한 의미로 '속에묻힌' '박힌' '각인된' '봉인된' 을 의미한다. 일상적인 현실의 이런 상징적인 면 속에 봉인된 것은 물질성과 정신성을 함께 회복한 통합, 분리되기 이전의 통합니다.”
기하학적인 엄밀성, 수정의 청명성은 쥘리앵 그라크가 '사물들의 저장고의 전지전능한 감정' 이라고 부르는 것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이 역행은 불안감 없이는 실행되지 않는다. 더욱이 쥘리앵 그라크는 '공포의 감정까지'도 수반된다고 말한다. 사실 그만큼 모순된 삼정들이 동시에 자극될 수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에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는 고뇌, 게다가 '공포 속에서 발생하는 모순된 대상' 까지도 보여 주었다.
--- pp.7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