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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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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7년 11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392쪽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51023538
ISBN10 8951023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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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때늦은 장맛비도 아니고, 새벽부터 내린 가을비가 늦은 밤이 되도록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었다. 굵은 빗방울이 제법 가늘어지기는 했지만 추적추적 내리는 모양새를 보니 쉽게 그치진 않을 것 같다.
날씨 탓인지 주택가임에도 불구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건물 밀집지역이 으레 그렇듯 차들이 골목골목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현욱이 수시로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는 곳은 빈 공터를 정리하고 들어선 신축빌라였다. 주위에 다닥다닥 붙어 주차된 차량이 무색하게도 신축빌라 주차장에는 두어군데 자리가 남아 있었다. 현욱은 빈 자리에 시선이 갈 때마다 짜증이 났다. 빈 자리가 있다는 것은 그 자리의 임자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건 곧, 그 임자가 야심한 시각까지 밤 문화를 즐기고 있다는 의미였다.
“징그럽게 내린다.”
현욱은 모든 탓을 내리는 비에게 돌리며 퉁명스러운 손놀림으로 라디오를 켰다.
‘…도 비가 내렸어. 나….’
“왜! ……알았어.”
현욱은 멜로디가 귓가에 와서 제대로 박히기도 전에 인정머리 없이 라디오를 꺼버린, 운전석에 앉은 남자를 향해 자신의 처지를 잊고 언성을 높였지만 곧 꼬리를 내렸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그런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팔짱을 낀 채 시트에 등을 대고 눈을 감았다.
무표정한 남자를 향해 소리 없이 입을 오물거려보지만 곧 그것도 시들해져 방향을 바꿔 다시 빌라 입구를 주시했다.
“한 삼십 분 만 기다리다 가자. OK? ……진짜 차만 정비소에 안 들어갔어도. 근데 비 진짜 열심히 내리지 않냐?”
전방을 주시하며 혼자 얘기하던 현욱은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입가에 모양 좋은 곡선이 그려졌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다시 침묵이 내려앉은 차 안. 규칙적으로 시멘트 바닥을 울리는 빗방울 소리가 사람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
이쯤해서 그만 돌아가자고 하려던 현욱은 비에 젖은 노면을 가르는 경쾌한 마찰음에 입을 다물었다. 현욱은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곧, 흐린 가로등 불빛 아래로 새로운 빛이 들어왔다.

좁은 골목에 하얀 각설탕 같은 경차 한 대가 라이트를 켜고 들어섰다. 작은 차는 그가 내내 주시하고 있던 건물 앞에서 멈추어 섰다. 잠시 후, 차량의 비상등이 켜지고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휘익!”
조수석에 앉은 현욱의 입에서 짧은 휘파람이 새어나왔다.
차에서 내린 여자는 직장여성인 듯 무릎 바로 위에 오는 스커트에 평범한 흰색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그러나 옷감에 감싸인 몸매는 평범치 않았다. 내리는 비에 고개를 숙인 여자는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최대한 감싸며 빌라 입구로 뛰어갔다. 여자가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센서등이 켜졌다. 현욱은 여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와우! 끝내준다.”
여자가 입구에서 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현욱은 이제 그만 가자는 말 대신에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유리문이 열리고 추리닝 바지 차림의 한 남자가 나왔다. 손에 든 비닐봉지를 남자에게 건넨 여자는 자리에 서서 남자와 얘기를 나누는 것 같더니 남자가 뒤돌아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따라 들어갔다.
“여기 거주하는 여자는 아닌 것 같은데…… 뭐하는 여잘까?”
여자가 이미 눈앞에서 사라졌는데도 여자의 차는 여전히 비상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현욱은 애초에 여기 온 목적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안타까운 마음 없이 낯선 여자가 얼마 만에 나올까 시간을 재며 기다렸다.
“이것저것 봐서는 주택가에 침투한 티켓 같지 않냐? 입은 옷이 좀 걸리지만 직장여성 콘셉트일 수도 있고…… 그런데 몇 분 만에 나오려고 라이트도 안 끄고 들어 가냐. 십 분 단윈가? 어, 나온다!”
남자를 따라 들어간 지 오 분여 만에 나온 여자는 현관문이 열리기도 전에 한 팔을 들어 이마 언저리에 대더니 경차가 있는 방향이 아닌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비 내리는 밤길에 우산도 없이 뛰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사이드미러를 통해 애처롭게 비쳤다. 이제 그만 자리를 뜰 때도 됐건만 몸매가 환상적인 것만 알지 그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여자가 왠지 마음에 걸리고 아직도 비상등을 깜빡이는 작은 차가 걸려서 현욱은 쉽게 가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슬쩍 옆 자리로 눈을 돌렸는데 어쩐 일인지 잠잠하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빠르게 바닥을 울리는 구두소리에 사이드미러로 눈을 돌렸다. 여자가 조금 전과 같은 자세로 빗속을 뛰어오고 있었다. 처음처럼 여자는 번호를 눌렀고 추리닝 바지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입구에서 남자에게 무언가를 건네주고 건네받은 여자는 돌아서는 남자를 향해 가벼운 목례를 했다.
몇 분 사이에 빗속을 혼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한 편의 마임을 보여주던 여자는 무슨 일인지 건물 입구에 선 채로 남자가 사라져간 유리문 안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움직임이 없자 입구의 조명이 꺼졌다. 왠지 계속해서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는 것만 같은 여자가 뒤돌아서며 걸음을 옮겼을 때 머리 위의 센서등이 다시 불을 밝혔다.
“흡!”
숨이 턱 막혔다. 여자의 얼굴 주위로 후광이 비쳤다. 현욱은 뽀얗고 맑다 못해 그림 같은 얼굴을 보며 갑자기 시상이 떠올랐다.
“너… 달빛아래 피어난 배꽃 본 적 있냐?”
“…과 순수.”
“뭐?”
이제껏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운전석의 남자가 여자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낮게 읊조렸다.
“관능과 순수.”

여자는 한 장소에서 시간을 꽤 지체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에 오른 후에도 선뜻 기어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종종거리고 다닐 때는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에 젖은 몸에 오싹 한기가 들었다. 몸을 틀어 뒷자리에 놓여있는 휴지를 집어 들었다. 주유소에서 판촉용으로 나눠준 화장지에 형광물질이 검출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후로는 피부에 대고 사용하는 일은 피했었다. 그러나 물기를 머금어서 있는 대로 졸아든 화장지를 밀가루 반죽하듯 꾹꾹 누르고 있는 여자의 심기는 지금 그런 것까지 가릴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새알 만 해진 휴지뭉치를 담을만한 것을 찾다 못 찾은 여자는 조금 전 빠져나온 신축건물 3층을 향해 고개를 획 쳐들었다.
“저런 느작 없는 것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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