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무어의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으로는, 1938년의 드러누은 석상과 1946년의 기대 누운 목상 두 점을 들 수 있다. 이 조상들에는 수많은 여러 다른 연상들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전자에는 멘히르(menhir)의 감정이나 바닷물에 닳아 빠진 바위의 추억 같은 느낌이 있고, 후자에는 십자군의 얼굴 같은, 공허한 가슴을 파고들어간 나무 심장의 고동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것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이 갈등하는 추억들은 인체에 순응함으로써 해결된다. 그리고 사실 그것들은 파르테논 신전의 <디오니소스>와 <일리소스>에서 최초로 구현된 누드 조각의 두 기본 이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즉 무릎을 구부리고 있는 석상은 언덕처럼 대지로부터 솟아오르고 있고, 텅 빈 흉부와 버린 다리를 가진 목상은 나무처럼 대지에서 돋아나려 애쓰고 있으면서, 강한 성적인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리하여 근대 예술은 과거의 예술보다도 훨씬 명황히, 누드란 단순히 육체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유추로써 우리의 상상적인 체험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구조에 인체를 관련시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인체를 그들의 기하학에 관련시켰다. 20세기의 인간은, 크게 확대된 육체생활 체험과 한층 더 정교해진 수학적인 상징의 패턴으로 인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한층 더 복잡해진 더 복잡한 유추 내용을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20세기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복잡한 유추를 자신의 모습 일부로서 가시적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자신을 신처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누드에 완벽성을 주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오늘날에 있어서도 여전히 누드가 맡고 있는 기능이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는 더 이상 신을 아름다운 인간과 같은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진 않지만, 우리 자신의 육체를 통해서 보편적인 한 이치를 깨닫는 듯할 때, 그러한 자기동일화의 축복닫은 찰나에, 우리는 여전히 신성에 가까이 갔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pp.475~476
<카시나 전투>를 위한 미켈란젤로의 데셍에 나오는 누드상들은 강하고 결연한 동시에 우아하며, 완벽하게 균형잡혀 있다. 영웅적인 힘과 경기자적인 힘이 여기서는 일치된다. 그리고 모든 회화 중 가장 유명한 누드들, 즉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예언자들, '이성적 영혼(aminae rationali)'의 표현이라고 일컬어지는 젊은이들을 부를 때에도 경기자들이란 칭호를 붙인다. 그들의 정확한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미켈란젤로가 그들을 육체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의 중개자로 의도했음은 명백하다. 그들의 육체미는 신적인 완벽성의 이미지이며, 민첩하고 활기찬 그 동감은 신적인 힘의 표현이다. 그리스 이상주의의 형식에 갇힌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육체는 강렬한 정신으로 충전되어 있어, 기독교에 봉사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몇몇 경기자들은 고대 원작을 원류로 하고 있는데, 특히 최초에 손댄 두 사람이 그렇다. 그 포즈는 오늘날까지 경옥조각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 경기자들에는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에 처음 나타났던 것과 동일한 기본적인 운동 리듬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미 윤곽선이 굴곡되거나 살붙임이 변전되어 가는 곳마다 긴박감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리스인들이라면 그런것을 번잡스럽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여겼으리라. <원반 던지는 사람은 그 동세 표현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육체적 현재 안에서 존재한다. 반면 미켈란젤로의 경기자들은, 어쩌면 그것이 과거일지라도, 육체를 초월한 어떤 미래를 향해 몸부림 치고 있다.
혼은 아직 육신의 옷을 걸친 채
이미 몇 번이고 신을 향해 올라가노라.
이 쉴 새없는 전율, 말하자면 모든 형태가 소멸될까 불안하여 땅을 긁고 있다는 이 느낌은, 해부학적 지식으로 제한될 때 비로소 그 효과를 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표현주의의 폭풍이 인물들의 형체를 망가뜨려 놓을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이 지식이야말로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고대로부터 포즈를 취해 와 고전적 규준을 훨씬 초월한 표현으로까지 발전시키게끔 했다. 그 한 예는 페르시아 무녀 옆에 있는 경기자이다. 기묘하게도 그의 포즈는 헬레니즘 부조에서 바커스의 무릎에 기대고 있는 아리아드네에게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그러나 그의 오른쪽 어개의 근육은 고대의 어떠한 인물의 어깨와도 다르다. 여자의 어깨는 더더욱 닮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의 등을 어떤 고전적 경기자상, 예를 들어 뮌헨에 있는 <일리오네우스>와 비교해 본다면, 미켈란젤로가 이미 1512년이라는 시점에서도 정통적 고전 비례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었나를 알 수 있다. 거대한 양 어깨가 작은 엉덩이를 향해 급격히 용두사미가 되어 버리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왜곡이다. 그러나 강하게 빨아들이는 리드미컬한 힘이 그 앞으로 인체의 모든 굴곡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등의 윤곽선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웅장한 건축 데생에 나오는 쇠시리(moulding)의 측면도만큼 거의 추상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심오한 해부학 지식에 바탕을 두지 않았더라면 우리를 설득시키지 못했을 것이며, 아마 쇠시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리라.
pp.271~273
<카시나 전투>를 위한 미켈란젤로의 데셍에 나오는 누드상들은 강하고 결연한 동시에 우아하며, 완벽하게 균형잡혀 있다. 영웅적인 힘과 경기자적인 힘이 여기서는 일치된다. 그리고 모든 회화 중 가장 유명한 누드들, 즉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예언자들, '이성적 영혼(aminae rationali)'의 표현이라고 일컬어지는 젊은이들을 부를 때에도 경기자들이란 칭호를 붙인다. 그들의 정확한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미켈란젤로가 그들을 육체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의 중개자로 의도했음은 명백하다. 그들의 육체미는 신적인 완벽성의 이미지이며, 민첩하고 활기찬 그 동감은 신적인 힘의 표현이다. 그리스 이상주의의 형식에 갇힌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육체는 강렬한 정신으로 충전되어 있어, 기독교에 봉사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몇몇 경기자들은 고대 원작을 원류로 하고 있는데, 특히 최초에 손댄 두 사람이 그렇다. 그 포즈는 오늘날까지 경옥조각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 경기자들에는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에 처음 나타났던 것과 동일한 기본적인 운동 리듬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미 윤곽선이 굴곡되거나 살붙임이 변전되어 가는 곳마다 긴박감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리스인들이라면 그런것을 번잡스럽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여겼으리라. <원반 던지는 사람은 그 동세 표현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육체적 현재 안에서 존재한다. 반면 미켈란젤로의 경기자들은, 어쩌면 그것이 과거일지라도, 육체를 초월한 어떤 미래를 향해 몸부림 치고 있다.
혼은 아직 육신의 옷을 걸친 채
이미 몇 번이고 신을 향해 올라가노라.
이 쉴 새없는 전율, 말하자면 모든 형태가 소멸될까 불안하여 땅을 긁고 있다는 이 느낌은, 해부학적 지식으로 제한될 때 비로소 그 효과를 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표현주의의 폭풍이 인물들의 형체를 망가뜨려 놓을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이 지식이야말로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고대로부터 포즈를 취해 와 고전적 규준을 훨씬 초월한 표현으로까지 발전시키게끔 했다. 그 한 예는 페르시아 무녀 옆에 있는 경기자이다. 기묘하게도 그의 포즈는 헬레니즘 부조에서 바커스의 무릎에 기대고 있는 아리아드네에게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그러나 그의 오른쪽 어개의 근육은 고대의 어떠한 인물의 어깨와도 다르다. 여자의 어깨는 더더욱 닮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의 등을 어떤 고전적 경기자상, 예를 들어 뮌헨에 있는 <일리오네우스>와 비교해 본다면, 미켈란젤로가 이미 1512년이라는 시점에서도 정통적 고전 비례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었나를 알 수 있다. 거대한 양 어깨가 작은 엉덩이를 향해 급격히 용두사미가 되어 버리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왜곡이다. 그러나 강하게 빨아들이는 리드미컬한 힘이 그 앞으로 인체의 모든 굴곡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등의 윤곽선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웅장한 건축 데생에 나오는 쇠시리(moulding)의 측면도만큼 거의 추상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심오한 해부학 지식에 바탕을 두지 않았더라면 우리를 설득시키지 못했을 것이며, 아마 쇠시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리라.
pp.271~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