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항상 과도기라는 말이 우리의 분단시대처럼 잘 들어맞는 경우도 흔하지 않다. 정치 · 경제적 가치의 기준이 바뀌는 주기가 빠른 것은 물론이고 문학예술에서도 가치관의 변모 주기는 심한 쌍곡선을 나타내고 있음을 숨길 수 없다. 1950년대의 실존주의적 허무주의와 뿌리뽑힌 삶들에 대한 냉소적인 접근법이 참여문학론을 거쳐 민족-사실주의, 농민-노동자-민중문학론으로 승화되어오면서 통일 지향 문학에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실로 많은 작가들이 한 시기마다 떠올랐다가는 그 가치관의 변모에 발맞추지 못한 채 사라지곤 했다. 작가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시인도 평론가도 그랬지만, 아무런 글도 안 쓰는 소시민이나 지배층 인간상들도 세월의 부침에 따른 인생유전에서 헤어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언제나 지배층의 특권을 유지하면서 변신하여 새로운 권력편제에 잽싸게 끼여든 거듭나기 인생이 없는 바 아니지만, 또한 따지고 보면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오늘까지 외세의존적 권력구조는 항상 변함이 없기는 하지만, 문학사에서의 가치관 변모에 따른 명성과 영예의 명멸현상은 권력자의 그것에 못지 않게 그 부침이 극심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예술의 영원성이니 가치관의 시대적 전이니 하는 고상한 이론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문제작이 오늘의 냉대를 견디어야 하는 처지로 급전직하하는 현상은 우리 문학사의 한 특징이라고도 할 만큼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어제까지의 문학사를 지탱시켰던 가치의 척도가 엉망이었던 셈이다. 1950년대의 찬란했던 전후문학이 과연 먼 뒷날 우리 문학사에 몇이나 남을 것인가를 상상하노라면 이런 바람직스럽게 세우지 못했던 문학 풍토의 허망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약 올바른 문학관에 의한 수업과정과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풍토에서였다면 사라져갈 그 많은 작가들의 사정은 달라져 더 많은 작품들이 미래의 우리 문학사를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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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로 내려오자, 우리 어른들보다도 애들이 더 미치게 좋아했다. 애들이래야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우리 애와 역시 같은 나이인 준오의 애였다.
준오의 동생이 시골에서 농장을 하고 있어 벌써 몇 년째 별러오다가 지난 여름 휴가에 사내애 하나씩만 데리고 피서 겸 내려온 것이다. 듣던 대로 농장은 그닥 크지는 않았지만, 언덕받이 잔솔밭 가로 과수원이 있고, 원두막이 있는 수박밭도 있고, 과수원 옆으로 도랑도 흐르고 있어서 닷새쯤의 여름 휴가를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한낮이면 밀짚 벙거지를 쓰고 맨발에 러닝 바람으로 사내뿐인 어른 애가 한 덩어리가 되어 도랑을 오르내리 훑는 천렵 재미가 그 중 괜찮아서, 애들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즐거워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시골은 밤이 더 시골다웠다. 하늘에 별을 가득히 널려 있어도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칠흑의 어둠 속에 완연히 빨려들 듯이 우리는 무언지 아늑하면서도 소슬한 분위기에 잠겨들곤 하였다. 밤마다 마당의 평상 옆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어른은 어른들끼리, 애들은 애들끼리 소곤소곤 잡담을 나누곤 하였는데. 이렇게 이틀 가량 지나면서 우리는 묘한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들 자신이 몇천 몇만 몇억 겹으로 얽혀서 돌아가는, 우주라는 이름의 이 대자연의 운행 속에 어느새 완전히 잠겨들어, 그런 질서 속에 그냥 내맡겨져 있는 듯한 느낌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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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영희가 발작이나 일으킨 듯이 아버지 쪽으로 달려갔다. 한 손으로 식모를 가리키며, 한 손으로는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쪼개지는 듯한 큰 소리로 말했다.'아부지, 자 봐요. 언니가 왔어요, 언니가 ...... 정말 열두 시가 되었으니까 언니가 왔어요. 이제 정말 우리 집 주인이 나타났군요. 됐지요? 아부지 자, 어때요? 됐지요? 아부지.' 식모가 이번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말이에요. 아부지, 저렇게 언니가 왔어요. 그렇게도 기다리시던 언니가 왔어요.'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도 식모를 내다보는 영희의 눈길은 적의(敵意)로 타오르고 있고, 아버지는 영희의 부축을 받으며, 저리 비키라는 것인지, 혹은 어서 들어오라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게 한 손을 들어 허공에다 대고 허우적거리고, 성식과 정애도 엉거주춤하게 의자에서 일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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