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공간에서 막걸리와 소주, 맥주만 팔고 있는 중앙식당에는 젊은 시절에 곱상하다고 소문이 자자했을 법한 할머니 한 분이 우리를 맞아주셨다. 이곳 물금 출신이신 79세의 차소순 할머니다.
“그때는 주막이라는 이름도 붙이지 않고 주막을 혔지, 물금장이 괜찮았어. 5일과 10일 장인데, 지금은 골목장이 되어버렸어. 시장이 제법 컸는데 몇 년 새 다들 문 닫고 텅 비어 버렸어. 한창 잘 나갈 때는 주막이 열 집도 넘었어.”
“시집은 몇 살 때 가셨지요?”
“열아홉 살에 시집을 가가지고 스물한 살에 첫아이를 낳았어. 아이가 여섯이었는데, 큰 애가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해 남편이 죽었어.”
“그럼, 그동안 혼자 많이 힘들지 않으셨어요?”
“사는 데 신경쓰다 보니 과거는 다 잊어 버렸어. 어떻게 하면 애들 배곯지 않을까만 생각했지. 나는 살아온 얘기 입 밖에 잘 안 내. 해 봐야 다 소용없는 것이라서.”
어찌 그 쓰라렸던 과거들이 잊혀지겠는가. 기억조차 하기 싫어 그저 잊었거니 생각했을 것이다.
--- pp.41∼42, <첫날. 부산 동래에서 양산 물금나루까지│눈썹까지 빼놓고 가야 하는데> 중에서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서다가 집 안에서 풀을 뽑고 있는 할머니를 한 분 만나서 지난 세월을 듣는다.
“열여섯에 시집와서 여태껏 살았어, 저 길이 경주에서 서울로 가는 서울나들이 길이여. 옛날에는 저 큰 길이 없었지. 다 수양버들이 덮여서 도랑으로 지나댕겼어. 초닷샛날 아침 9시에 구미에서 시집을 오는데, 배 타고 산동으로 와서 여기 오니 오후 4시쯤이나 되었던가? 딸 하나, 아들 서이를 낳아서 잘 키웠지. 그런디 언제나 서울 간다냐? 세월 가는 대로 가며는 차 타고 가는 것보다 경치도 많이 보고 구경도 잘하고 남 사는 것도 보고 좋기는 좋겠다.” 하시더니 당신만이 아는 노래를 부른
다.
“영감아, 돈 벌러 간다. 어절씨구 잘 놀고 잘 사는 거지.”
좋은 일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좋지만 잘 놀고 잘 사는 것, 그게 누구나 바라는 바 아니겠는가?
“안 죽고 살며는 또 만나.”
다시 풀을 뽑으시는 할머니를 뒤에 두고 갈 길이 먼 우리들은 길은 나선다. “서울나들마을은 영남지방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가던 길”이라는 표지판을 뒤로하고 나선 길은 한적하지만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옛길이다.
--- pp.145∼146, <엿새째. 칠곡에서 구미시 도개면까지│걷기에 알맞은 몸> 중에서
길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지방도나 국도를 막론하고 먼 거리를 간다는 것은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국도를 걸어갈 때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집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생명보험을 들어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나라의 지방도나 국도 전체가 넓은 도살장으로 변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개나 고양이, 너구리, 토끼, 새 등 온갖 짐승들이 길 위에서 비명횡사를 하고 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어서 쏜살같이 지나가는 자동차들, 특히 화물차들이 일으키는 바람은 사람의 몸마저 휘청거리게 만든다.
이제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전통과 현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한 길들을 지금이라도 되찾고 보존하지 않으면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다. 그러한 길들, 즉 ??세종실록?? 지리지나 신경준의 ??산경표??,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에 나타나 있는 몇 개의 중요한 길 옆에다 사람이 걸어다닐 수 있는 보행자 전용도로, 특히 흙으로 된 길을 설치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외국에서도 옛길을 보존하고 있는 사례가 있다. 고대 로마의 길들과 일본 에도시대의 길들, 기독교 순례자들이 걷던 에스파냐의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길이 그것이다. 우리의 옛길 또한 마냥 방치할 것이 아니라 역사와 함께하는 길, 문화와 함께하는 길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 p.340∼341, <열나흘째. 양재에서 남대문까지│길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가 나의 스승> 중에서